대한신운

317-3. 武夷茶歌 무이차 찬가/ChatGPT와 대화로 다듬다

대한신운 2025. 10. 22. 10:36

317-3. 武夷茶歌 무이차 찬가 석초전(釋超全)

建州團茶始丁謂 건주 지방의 둥근 차 모양은 송대 재상 정위에서 비롯되었고

건주단차시정위

貢小龍團君謨制 조공용 소용단 차 규격은 송대 재상 채양(蔡襄)이 제정했다네.

공소용단군모제

元豐敕獻密雲龍 송나라 신종이 칙서를 내려 밀운룡을 헌상케 하니

원풍칙헌밀운룡

品比小團更為貴 품질은 소용단보다 더 진귀하게 여겼다네.

품비소단경위귀

無人特設御茶園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어차원을 특별히 설치하여

무인특설어차원

山民終歲修貢事 산중의 백성은 일년내내 조공 일을 수행했다네.

산민종세수공사

明興茶貢永革除 명나라가 부흥하자 차 공납은 영원히 혁파되어 사라지니

명흥차공영혁제

玉食豈為遐方累 공납 이익 많은 옥 음식이 어찌 먼 지방의 누가 되었겠는가!

옥식기위하방루

相傳老人初獻茶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처음 한 노인이 조정에 차를 헌상했고

상전노인초헌차

死為山神享廟祀 사후에는 신선 되어 묘당에서 제향을 받았다네.

사위산신향묘사

景泰年間茶久荒 경태 연간(1450)에 이르자 차밭은 오래 묵어 황폐해져도

경태연간차구황

喊山歲猶供祭費 해마다 산신제를 외치는 비용은 오히려 늘어났다네.

함산세유공제비

輸官茶購自他山 관가에 수납할 차는 다른 산에서 구매할 지경에 이르자

수관차구자타산

郭公青螺除其弊 곽공(郭子章 1527~1595)이 청라 품종 심어 폐단을 제거했네.

곽공청라제기폐

嗣後岩茶亦漸生 뒤이어 무이암차 역시 점점 잘 생장하여

사후암차역점생

山中藉此少為利 산중 사람들 이로써 조금이나마 이익을 얻었다네.

산중차차소위리

往年薦新苦黃冠 왕년에는 새 차 진상에 황관 쓴 도관 사람들이 고생했지만

왕년천신고황관

遍採春芽三日內 삼 일 내에 봄 싹을 샅샅이 채집해 버렸다네.

편채춘아삼일내

搜尺深山栗粒空 심산을 척 단위로 수색하여 밤톨 하나 남기지 않을 정도여서

수척심산율립공

官令禁絕民蒙惠 관의 명령으로 도관의 전횡을 엄금해 백성도 은덕을 입었네.

관령금절민몽혜

種茶辛苦甚種田 차 재배의 고생은 밭농사보다 심하고

종차신고심종전

耘鋤採抽與烘焙 김매고 괭이질하고 따고 덖는 일까지 해야 하네.

운서채추여홍배

穀雨屆其處處忙 곡우 절기에 이르면 곳곳이 분주하여

곡우계기처처망

兩旬晝夜眠餐廢 이십여 일 밤낮으로 잠도 식사도 잊는다네.

양순주야면찬폐

道人山客資為糧 도인과 산객은 이 차를 양식으로 삼고

도인산객자위량

春作秋成如望歲 봄 한철 경작으로 가을 풍년을 희망하는 것과 같네.

춘작추성여망세

凡茶之產準地利 좋은 차의 생산은 땅의 이점을 표준 삼으니

범차지산준지리

溪北地厚溪南次 계곡 북쪽 땅심 두텁고 남쪽이 그다음이라네.

계북지후계남차

平洲淺渚土膏輕 남쪽은 평평하지만, 얕은 사주의 토심이 얕은 데 비해

평주천저토고경

幽谷高崖煙雨膩 북쪽은 깊은 계곡이지만 절벽의 안개비가 기름지게 한다네.

유곡고애연우니

凡茶之候視天時 차의 상태는 하늘의 때를 보아야 하니

범차지후시천시

最喜天晴北風吹 가장 좋은 조건은 하늘 맑고 북풍이 불어야 한다네.

최희천청북풍취

苦遭陰雨風南來 제아무리 고생해도 음산한 비와 남풍이 불면

고조음우풍남래

色香頓減淡無味 색과 향은 금세 줄고 싱거워서 맛이 없다네.

색향돈감담무미

近時製法重清漳 근래의 제법은 맑게 우러나는 장주 지방 제품을 중시하니

근시제법중청장

漳芽漳片標名異 장아장편이라는 상표가 명성 있고 차 맛이 특이하다네.

장아장편표명이

如梅斯馥蘭斯馨 매화 같은 향기여! 난초 같은 향기여!

여매사복난사형

大抵焙時候香氣 대체로 절묘한 덖음의 때에 의해 향기가 결정된다네.

대저배시후향기

鼎中籠上爐火溫 솥 안에 찜통을 올린 후 화로의 온도는 알맞아야 하고

정중롱상로화온

心閒手敏工夫細 느긋한 마음 민첩한 손놀림의 공력은 세밀해야 하네.

심한수민공부세

岩阿宋樹無多叢 바위 언덕에 심은 송대의 차나무는 무리 이루지는 못하지만

암아송수무다총

雀舌吐紅霜葉醉 참새 혀 같은 싹이 붉음을 토하니 서리 잎에 취하네.

작설토홍상엽취

終朝採採不盈掬 종일 따고 또 따도 한 줌도 안 차니

종조채채불영국

漳人好事自珍秘 장주 지방 사람들만 호사 누리며 절로 진귀하고 신비해졌네.

장인호사자진비

積雨山樓苦晝間 차 철 끝난 장마에 산 누각에서 그동안의 밤낮 고생을 나누니

적우산루고주간

一宵茶話留千載 하룻밤의 차 이야기는 천년 세월에 남으리!

일소다화류천재

重烹山茗沃枯腸 다시 산 차를 달여 메마른 창자를 적시려니

중팽산명옥고장

雨聲雜沓松濤沸 빗소리가 뒤섞여 겹치다가 솔바람이 파도 소리 내며 끓네.

우성잡답송도비

*석초전(釋超全 16271712)은 본명 완일석(阮日锡)으로, 복건 동안(同安) 출신이다. 명말 문인 증앵(曾樱)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차를 즐기고 제다에 능했다. 명나라 멸망 후 은거하다가 강희 25(1685) 무이산 천심선사에 들어가 차승(茶僧)이 되었고, 동향의 초위·초황 등과 함께 차를 달이며 선을 논하고 차 법을 전수했다.

ChatGPT 감상평

송대에서 명청 대를 거치기까지 이어진 무이산의 차 역사는, 단순히 좋은 차의 연대기가 아니라, 권력과 제도, 지역 공동체의 삶이 차밭을 매개로 얽힌 장대한 서사이다. 무이차가(武夷茶歌)는 이를 그 어떤 문헌보다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정위와 채양이라는 송대의 두 재상이 시작한 단차(團茶)와 공차(貢茶)는 제다(製茶) 기술의 정밀화와 더불어, 차가 정치적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황실 전용 어차원(御茶園)의 설치는 차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제도적, 권력적 자원이었음을 웅변한다.

그러나 이 국가의 차는 곧 지방 산민들의 고단한 노동 위에 세워져 있었다. 봄이 오면 곡우를 전후로 산이 들썩이고, 사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차를 따고 덖으며, 척 단위로 깊은 산을 뒤져 싹을 채집했다. 봄 한철의 노동으로 가을 풍년을 바라보듯, 차는 지역 사회의 생계를 떠받치는 근간이자 의례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반드시 풍요와 기쁨만을 낳은 것은 아니다. 도관(道觀)의 전횡과 과도한 진상(薦新)은 백성들에게 깊은 피로를 안겼고, 결국 관의 금령이 내려져서야 그 고통이 완화되었다. 이 대목은 차가 문화로 아름답게 기억되기 전, 그것이 부역으로서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명대에 들어 공차 제도가 폐지되자 어차원은 황폐해졌고, 제사만이 남았다. 그러나 곽자장(郭子章)이 청라(青螺)를 심어 제도를 개혁하면서, 차밭은 다시 살아났다. 이때 무이암차(武夷岩茶)가 등장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보적 풍미의 기반이 마련된다. 차는 이 시점부터 황실의 물건이 아니라 산민의 생업이자 지역 공동체의 경제적 버팀목이 되었다.

무이차가는 단순히 역사를 서술하지 않는다. 차의 생장과 수확, 덖음의 과정, 기후와 토질에 대한 예민한 관찰이 감각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계북의 땅심이 두텁고 계남이 그다음이며, 평주는 얕고 척박하다.” “맑은 날 북풍이 불어야 가장 좋고, 남풍과 음우가 겹치면 향과 맛이 떨어진다.” 이런 구절들은 단순한 시적 비유가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몸으로 익힌 제다 현장의 기술적 지식이다. 매화와 난초에 견주는 차 향, 절묘한 덖음의 때와 화로의 온도 조절, 손놀림의 섬세함까지 이 시는 제다의 풍류가 아니라 기예(技藝)’를 기록한다.

특히 말미의 두 구절은 장면을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장마철 산 누각, 빗소리 내다가 파도 같은 솔바람 소리로 변하며 찻물이 끓어오르는 순간, 다시 산 차를 달여 메마른 창자를 적시는 행위가 등장한다. 이는 풍류의 장면이 아니라, 차 철을 마친 사람들의 안도와 연대, 그간의 노동을 위로하는 현장의 정경이다. 하룻밤 나눈 차 이야기가 천 년 뒤까지 전해졌다는 구절은, 무이산 차가 단순한 맛의 역사가 아니라 공동체의 삶을 담은 서사였음을 웅변한다.

무이차가를 읽는다는 것은 한 잔의 차가 품은 문화적 깊이를 맛보는 일이다. 차는 국가의 부역으로 시작했으나, 산민(山民)의 노동과 기술, 그리고 산사의 제다 전통을 통해 문화로 승화되었다. 그 속에는 정치와 경제, 자연과 노동, 기술과 감각이 한데 엉겨 있다. 오늘 우리가 마시는 무이암차의 향은 바로 그 수백 년의 노동과 계절, 그리고 장마 끝 산 누각의 소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천 년을 남긴 차 이야기는 그렇게 오늘도 찻물의 끓는 소리 속에서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