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운

492. 聲律 성률/Gemini 3 Flash와 대화로 재구성하다

대한신운 2026. 3. 7. 06:08

492. 聲律 성률/()

音律所始從人聲 (음률소시종인성)

음률의 시작은 사람의 목소리를 따른 것이며

聲含宮商肇血 (성함궁상조혈)

소리에 담긴 오음은 혈기에서 스스로 비롯되었네.

先王因之制樂歌 (선왕인지제악가)

선왕께선 이를 따라 음악과 노래를 만드셨고

器寫人聲非學 (기사인성비학)

악기가 목소리 묘사한 것이지 목소리가 악기 배운 게 아니라네.

神明樞機則言語 (신명추기즉언어)

정신의 지도리는 곧 언어이며

吐納律呂脣吻 (토납률려순문)

가락을 내뱉고 들이마심은 입술에 달렸을 뿐이라네.

古之敎歌揆以法 (고지교가규이법)

옛날에 노래를 가르칠 땐 법도로 헤아려

疾呼中宮徐呼 (질호중궁서호)

빠르게는 궁음에 맞추고 느리게는 치음을 불렀네.

徵羽響高宮商下 (치우향고궁상하)

치와 우음은 울림이 높고 궁상은 낮으니

五音調和成律 (오음조화성률)

오음이 조화되어 음률의 이치를 이루네.

喉舌脣齒和抗攢 (후설순치화항찬)

목구멍 혀 입술 치아 조화롭게 높이고 오므리니

廉肉相準皎然 (염육상준교연)

가늘고 두터운 소리 어울려 명확히 드러나네.

琴絃不調必知改 (금현부조필지개)

거문고 줄 고르지 않으면 반드시 고칠 줄 알면서

摛文乖張而不 (치문괴장이부)

글 짓다 소리 어긋나도 조절할 줄을 모르네.

響在被絃乃得諧 (향재피현내득해)

울림이 현 위에 있을 때는 조화로움을 얻으나

聲萌我心猶失(성맹아심유실)

소리가 내 마음에서 싹틀 때는 오히려 실기하네.

良由外聽易爲巧 (양유외청이위교)

진실로 밖으로 듣는 것은 기교를 부리기에 쉽지만

心聲無準難爲 (심성무준난위)

마음 소리는 기준이 없어 지혜로도 다스리기 어렵네.

外聽之易絃以手 (외청지이현이수)

밖으로 듣기 쉬움은 줄을 손으로 잡기 때문이요

內聽之難聲紛 (내청지난성분)

안으로 듣기 어려움은 소리가 기운과 뒤섞이기 때문

故歌樂追求不難 (고가악추구불난)

그러므로 음악의 기교를 추구함은 어렵지 않으나

創作辭逐豈容(창작사축기용)

창작하며 소리의 조화를 쫓기란 어찌 쉽겠는가!

聲有飛沉分淸雅 (성유비침분청아)

소리에 높낮이 있어 맑고 우아함 나누고

響有雙疊起生 (향유쌍첩기생)

울림에 쌍첩 있어 생생한 기운 일깨우네.

疊韻雜句而必睽 (첩운잡구이필규)

첩운이 문장에 섞이면 반드시 서로 등 돌리고

雙聲隔字而每 (쌍성격자이매)

쌍성이 글자 사이에 떨어지면 매번 어긋나네.

沈滯則響發而斷 (침체즉향발이단)

소리 너무 가라앉으면 울림이 끊어지고

飛昻則聲颺不 (비앙즉성양불회)

소리 너무 날아오르면 흩날려 돌아오지 않네.

轆轤交往亦逆鱗 (녹로교왕역역린)

도르래처럼 엇갈리고 또한 역린과 같으니

迂其際會往來 (우기제회왕래)

그 만남이 우회하여 왕래는 지체되네.

口吃疾病迷外聽 (구흘질병미외청)

말을 더듬는 질병은 겉 소리에 미혹되어

不得內聽但逐 (부득내청단축)

마음의 소리를 얻지 못하고 단지 신기함을 쫓아서라네.

將欲解結務剛斷 (장욕해결무강단)

얽힌 매듭 풀고자 하면 반드시 굳세게 결단해야 하고

左右凝滯自前 (좌우응체자전)

좌우로 막히고 머뭇거림은 앞에서부터 다스려야 하네.

則聲轉於吻吐玉 (즉성전어문토옥)

그러한즉 소리는 입술에서 굴러 옥을 토하니

纍纍如貫珠響 (유유여관주향)

줄줄이 엮임이 꿰어놓은 구슬 울림 같으리라!

聲畫妍蚩寄在詠 (성화연치기재영)

소리의 그림이 곱고 추함은 읊조림에 달려 있어

滋味氣力生韻 (자미기력생운)

풍부한 맛과 기력이 운치를 낳는다네.

異音相從謂之和 (이음상종위지화)

서로 다른 소리 어우러짐을 화라 일컫고

同聲相應以韻 (동성상응이운)

같은 소리 서로 응함은 운으로써 다스리네.

韻氣一定生餘韻 (운기일정생여운)

운의 기운 하나로 정해지면 여운을 낳지만

和體千變響難 (화체천변향난)

조화로운 체는 천 가지로 변하니 울림 쉽지 않네.

屬筆易巧而和難 (속필이교이화난)

붓을 잡으면 기교 부리긴 쉬우나 조화롭긴 어렵지만

綴文難精和韻 (철문난정화운)

글을 엮음에 정밀하긴 어려워도 운의 조화는 쉽다네.

宮商大和如吹籥 (궁상대화여취약)

궁상의 큰 조화는 피리 부는 것 같으니

籥含定管往不 (약함정관왕불)

피리는 정해진 관 머금고 나아감이 한결같다네.

和韻之動若轉圓 (화운지동약전원)

조화로운 운의 울림은 둥근 바퀴 구르듯 매끄럽지만

枘方訛音大過 (예방와음대과)

자루를 네모에 끼워 넣듯 어긋난 음은 큰 잘못이라네.

練才洞鑒剖鑽字 (연재동감부찬자)

숙련된 재주는 깊이 통찰하여 글자를 쪼개고 뚫지만

疎識闊略舛音 (소식활략천음)

거친 식견은 서툴고 소략하여 소리 어긋나도 방치한다네.

若長風過籟不音 (약장풍과뢰불음)

마치 긴 바람이 구멍을 지나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 같고

亦東郭之吹竽 (역동곽지취우)

또한 동곽 선생이 피리 부는 시늉 하는 것일 뿐이네.

古之君子何節步 (고지군자하절보)

옛날의 군자는 무엇으로 걸음걸이 마디를 조절했던가!

左宮右徵佩玉 (좌궁우치패옥)

왼쪽은 궁 오른쪽은 치음의 옥을 차고 다스렸다네.

聲不失序以律文 (성불실서이률문)

소리가 질서를 잃지 않음으로써 문장을 다스리니

聲律調和豈忽 (성률조화기홀)

소리와 가락의 조화로움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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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률(聲律)은 소리 속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의 법칙이며, 문학에서 음성 효과가 지닌 미학의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음률의 기원은 본래 사람의 목소리에서 비롯된 것이니, 언어는 문장을 구성하는 관건이자 지혜를 드러내는 핵심이다.

음률을 내뱉는 것이 입술과 목소리의 작용이라고 인식한 까닭은 음의 본질이 악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소리를 악기가 모방한 데서 찾았기 때문이다. , 언어 또한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본연의 수단인 것이다. 음악은 곧 즐거움이며 인간의 본성에서 분출되는 생명력이다. 유협 역시 성률이 사람의 감정을 가장 생생하게 표현하는 수사의 요체라는 점을 중시했다.

Gemini 3 Flash 해설

성률(聲律): 옥을 토하고 구슬을 꿰는 소리의 이치

소리의 무늬인 ()’에 규율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목소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리가 궁····우의 높낮이를 가지는 것은 인간의 생리현상인 혈기(血氣)에서 유래한다. 옛 선왕들은 소리의 높낮이에 바탕을 두어 음악과 시가를 창작했으니, 악기가 사람의 소리를 묘사한 것이지 인간의 소리가 악기의 소리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높낮이를 가진 말이 문학 창작의 관문과 빗장이 되고, 신비로움을 밝히는 문지도리와 방아쇠가 되어, 양의 리듬인 ()’과 음의 리듬인 ()’를 들숨과 날숨처럼 만들어내니, 언어에 음악성을 부여하는 것은 입술의 동작일 따름이다. 옛날 사람에게 음악을 가르칠 때는 먼저 일정한 법칙으로 소리를 조절하게 했는데, 세차게 소리내어 의 음에 맞추고, 느리게 소리내어 의 음에 맞추었다. ‘는 소리가 높고, ‘는 소리가 낮다. 목을 들고 혀를 구부린 차이와 입술을 오므리고 혀의 움직임을 다르게 함으로써, 가늘고 예리한 소리와 굵고 완만한 소리가 서로 대비되어 명백하게 구분될 수 있다.

지금 거문고를 연주하는데 리듬이 조화되지 않으면 반드시 현을 늘려서 고쳐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문장을 펼친 것이 어긋나 있는데도 조절할 바를 알지 못한다. 현에 있는 소리는 이내 조화시킬 수 있으면서, 내 마음속에서 생겨난 소리인데도 오히려 성률의 조화를 잃게 된다. 그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표준이 정해져 있어서 훌륭하면 교묘한 소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는 일정한 표준이 없어서 지혜롭게 깨닫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외부의 음을 듣고 아는 것은 쉬워서 현을 손으로 조정할 수 있지만, 마음의 소리를 듣기는 어려워서 소리는 마음과 더불어 어지럽게 된다. 그러므로 음악에서 성률의 추구는 가능하지만, 문학 창작에서 표현의 추구는 어려운 것이다.

대체로 음성에는 가볍고 맑은소리인 비성(飛聲)’과 무겁고 탁한 소리인 침성(沈聲)’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에는 방불(髣髴 fǎng fú)·강개(慷慨 kāng kǎi)와 같은 쌍성(雙聲)’과 소요(逍遙 xiāo yáo)·난만(爛漫 làn màn)과 같은 첩운(疊韻)’이 있다. ‘쌍성은 한 구에서 글자를 연속해 쓰지 않으면 매번 소리가 어긋나게 되고, 한 구에 사용된 첩운도 구를 분리하면 반드시 맞지 않게 된다. ‘침성만 사용하면 소리가 나오면서 갈라지고, ‘비성만 사용하면 들뜨게 되어 안정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계추나 원반을 매달아 회전시키는 녹로(轆轤)의 끈처럼, 교대로 왕래하는 모습이 용의 비늘이 나란한 것에 비교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녹로는 우물에서 물을 긷거나 무거운 물건을 올릴 때 쓰는 도르래 장치로, 끈이 바퀴를 감고 풀리며 끊임없이 교차하고 왕래하듯 성률 또한 낮은 소리와 높은 소리가 매끄럽게 엇갈려야 함을 비유한 것이다. 만약 이러한 성률의 조화가 어긋나게 되면, 그것은 마치 용의 목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인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 역린은 한비자(韓非子)에서 유래한 말로, 건드리는 자를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금기이니, 문장에서 음의 조화가 깨지는 것은 곧 용의 분노를 사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인 병통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함이 어긋나서 가장자리에서 만나게 되면 절름발이로 간대로 줄지어 돌아온다. 그것이 병이라고 한다면, 작가가 가진 말더듬이라는 구흘(口吃)’의 병이다. 문학 창작에서 구흘이라는 병은 신기한 표현만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신기함과 기이한 표현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목과 입술에 어지러움이 휘감기게 되는 것이다. 휘감긴 매듭을 풀어 내기 원한다면 표현으로 뜻을 해치지 않도록 알맞은 판단을 내리는 데 힘써야 한다. 왼쪽에서 성률의 장애를 만나면 오른쪽에서 그 휘감김을 풀어내는 방법을 찾고, 끝에서 막히면 앞부분을 검토하여 풀어내야 한다. 그 결과 성률은 입술에서 구르게 되어 옥을 흔드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될 것이며, 표현이 귀에 스치면 주렁주렁 매달린 구슬 꾸러미에서 나는 소리와 같을 것이다.

무릇 성률이 적절하게 움직이면 표현의 기세는 둥근 구멍 속에 끼워 넣은 장부()’를 자유자재로 돌릴 수 있게 되지만, 성률의 배열이 잘못된 채로 창작된다면 둥근 구멍 속에 끼워진 네모진 장부보다 심한 어긋남이 생길 것이다. 장부란 가구의 부재를 이을 때 구멍에 끼우도록 만든 돌출된 부분으로, 원형 구멍에 네모진 장부를 억지로 끼우면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네모진 장부의 병통을 면하듯이 문학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면 큰 잘못은 없게 될 것이다. 창작에 대한 재능이 정련되어 깊이 살필 수 있다면 글자의 분석으로 성률을 깊이 연구하여 배열할 수 있지만, 식견이 모자라서 깊이 살필 수 없다면 성률이 계획 없이 흐르다가 부딪치게 된다. 이는 마치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퉁소 관 속을 통과하더라도 구멍과 소리의 이치가 맞지 않아 음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으니, 실력도 없으면서 무리 속에 섞여 생황을 부는 흉내만 냈던 동곽(東郭) 선생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한비자(韓非子)에 전하기를, 제나라 선왕은 300명의 피리() 합주를 즐겼는데, 피리를 전혀 불 줄 몰랐던 동곽 선생은 그저 머릿수를 채워 녹봉을 얻고자 합주단에 끼어들어 볼을 부풀리며 연주하는 시늉만 했다. 수년 동안 그 가짜 연주는 거대한 소리의 조화 속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으나, 독주(獨奏)를 즐기는 민왕이 즉위하자 한 사람씩 왕 앞에서 실력을 증명해야 했고, 동곽 선생은 결국 밤을 틈타 도망쳐야 했다. 성률의 이치를 모른 채 기교만 흉내 내는 자는 거대한 문장들 속에 숨어 잠시 안목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홀로 드러나는 문장의 마디 앞에서는 반드시 그 허위가 밝혀진다. 옛 군자가 반드시 옥을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예기(禮記)에 이르길 의 소리가 나는 옥은 왼쪽으로, ‘의 소리가 나는 옥은 오른쪽에 차고 소리를 조절하면서 걸었다. 소리가 질서를 잃지 않듯이 문학 창작에서도 성률로 인하여 법칙 있는 문장을 이루게 되니, 어찌 이 엄중한 규칙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 사족(蛇足)

고전의 사례를 인용할 때 흔히 특정 인물을 부정의 사례로 끌어들여 비판의 도구로 삼곤 한다. 하지만 이때 경계해야 할 점은 나의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는 까닭 없이 돌을 맞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나 스스로 한 번쯤 성찰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한비자(韓非子)이래 동곽 선생은 남에게 편승하는 파렴치한 사례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글을 짓다 보니 문득 그러한 생각에 미친다. 실력은 좀 떨어졌을지언정, 수백 명의 합주단 속에서 몇 년 동안이나 부는 체하며 그 리듬과 호흡을 맞추는 일이 과연 능력 없이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한비자는 논리로써 이를 증명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논리 아닌 것이 되어버린 사례일지도 모른다.

동곽 선생 또한 거대한 조화의 흐름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혹은 그 집단 속에 머물기 위해 남모르는 절박함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타인을 비하하여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방식은 인간이 동물에게 잔혹한 악명을 씌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문의 길은 앞선 이의 과오를 비난하며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감사함을 느끼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상대가 이유 없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앞사람의 부족함마저 바탕으로 삼아 성장하는 겸허함을 되돌아본다. 타인에게 무심코 던지는 비방이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성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갖추어야 할 기본일 것이다. 동곽 선생의 예를 보면서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어 사족(蛇足)을 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