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1. 娜拉走後怎樣 나랍주후즘양/대한신운·거(居)운
海上夫人留家庭 (해상부인류가정)
바다에서 온 여인은 가정에 남았고
自謂傀儡娜拉去 (자위괴뢰나라거)
꼭두각시라고 여긴 노라는 떠났네.
阿爾志跋綏夫問 (아이르지발수부문)
아르치바셰프가 묻기를
黃金世界何時來 (황금세계하시래)
황금 세계는 언제 오는가?
玉樓赴召猶自慰 (옥루부소유자위)
옥루의 부름을 오히려 스스로 위안 삼고
阿哈斯瓦爾受詛 (아합사와이수저)
아하스와르는 저주를 받았네.
涸轍鮒魚求滴水 (학철부어구적수)
마른 수레바퀴 자국의 붕어는 물 한 방울을 구하고
菩提樹下思救世 (보리수하사구세)
보리수 아래에서는 세상 구할 일을 생각하네.
青皮齷齪拳匪後 (청피악착권비후)
청피의 악착같음은 권비의 난 후이며
客笑觳觫豈所待 (객소곡속기소대)
관객이 벌벌 떠는 모습을 비웃으니 어찌 기대할 바 있으랴!
自由前提何優先 (자유전제하우선)
자유의 전제는 무엇이 우선인가!
住也去也唯經濟 (주야거야유경제)
남든 떠나든 오직 경제권이라네.
一時犧牲但驚動 (일시희생단경동)
일시의 희생은 단지 놀라게 할 뿐이지만
韌韌鬪爭唯打開 (인인투쟁유타개)
끈질기고 끈질긴 투쟁만이 오직 타개할 수 있네.
* 거(居)운: 거, 게, 계, 녀(려, 례), 개, 괘, 쾌, 내(래), 대, 몌, 매, 서, 세, 새, 쇄, 어, 여, 예, 왜, 저, 제, 재, 처, 체, 채, 터, 태, 폐, 패, 허, 혜, 훼, 해
* 《인형의 집 Et dukkehjem》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Nora로, 우리말로는 ‘노라’라고 거의 그대로 옮길 수 있지만 중국어로는 가장 가까운 발음인 나라(娜拉 Nàlā)로 옮긴다. 작가 Ibsen 역시 우리말로는 ‘입센’이라고 거의 그대로 옮길 수 있지만 중국어에서는 이부성(易卜生 Yìbǔshēng)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음역을 대할 때마다 우리말이 얼마나 좋은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 지난날 노신의 문학에 심취했을 때 특히 노라는 가출한 뒤 어떻게 되었는가(娜拉走後怎樣 Nàlā zǒu hòu zěnyàng)는 참으로 감명 깊게 읽은 글이다. 여권통문(女權通文)의 날에 대해 구성하다 보니 홀연 이 글이 떠올라 내용 중에 인용된 고사성어와 관련 이야기를 재학습하는 뜻에서 엮어 둔다.
이렇게 엮는 또 다른 뜻은 시의 구성에서 쉽게 알아볼 수 없는 전고나 성어를 지나치게 인용하는 것은 좋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고시에서 간혹 볼 수 있는 병폐로, 주석을 많이 달아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과연 좋은 표현인지 언제나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오만으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너희들이 나의 이 깊은 능력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듯해서다.
지나치게 많은 설명이 필요한 전고나 성어를 쓰려면 산문으로 나타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겨우 8구에 천하를 담을 수는 없다. 사족이지만 《도덕경》을 읽을 때마다 사상서로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문장으로서는 낙제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겨우 오천여 자로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축약한 것은 좋게 말하면 심오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억측을 낳아 혹세무민으로 이끌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문장은 명료할수록 좋다. 다만 그 명료함은 유치함과는 다른 것이다. 이 작품은 해설 없이 이해하기가 난해하므로 ChatGPT의 에세이식 주석으로 대신한다.
⇓ ChatGPT 에세이식 주석
노신(魯迅 1881~1936)의 〈노라는 가출한 뒤 어떻게 되었는가(娜拉走後怎樣)〉는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北京女子高等師範學校)에서 한 강연을 바탕으로 한 글이다. 제목의 노라(娜拉)는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Ibsen 1828~1906)의 《인형의 집 Et dukkehjem》에 나오는 주인공 Nora이다. 《인형의 집》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한 가정에서 아내 노라가, 자신이 독립된 인간이 아니라 남편의 뜻과 취향에 맞추어 살아온 존재였음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희곡이다. 노라는 남편 헬메르(Helmer)를 위해 몰래 돈을 빌리고 그 과정에서 서명을 위조한다. 그것이 밝혀질 위기에 놓이자, 노라는 남편이 자신을 이해하고 함께 책임을 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헬메르는 자신의 명예와 사회 체면부터 걱정하며 노라를 비난한다. 문제가 해결되어 위험이 사라지자, 다시 노라를 용서하겠다고 하지만, 노라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남편에게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사랑스럽게 다루어지는 인형과 같은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가며 작품은 끝난다.
입센은 그 뒤 노라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쓰지 않았다. 노신은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을 시작한다. 집을 나간 뒤 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유를 깨달았다고 해서 현실에서 곧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려면 먹고 입고 거처할 수 있어야 한다. 노신은 노라 앞에 실제로 놓일 가능성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경제의 독립이 없다면 타락하거나 다시 돌아오는 길밖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관념에 머무는 자유의 선언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권(經濟權)이다. 부모와 남편에게 경제를 의존하는 상태에서 정신의 해방만을 외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노신의 논의는 경제권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상 사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현재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 사람의 희생으로 사회를 깨울 수 있는가! 희생을 구경거리로 바라보는 군중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차례로 묻는다. 그리고 순간의 장렬한 희생보다는 현실 속에서 오래 버티며 권리를 요구하는 끈질긴 싸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라의 가출을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여성 문제를 넘어 이상과 현실 생존과 자유 희생과 군중의 문제까지 넓혀 간다.
海上夫人留家庭의 해상부인(海上夫人)은 입센의 희곡 《Fruen fra havet》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海上夫人》으로 번역되었으며 우리말로는 《바다에서 온 여인》이라고 번역된다. 주인공은 엘리다(Ellida)라는 여성으로 의사 방엘(Wangel)과 결혼하여 살고 있다. 그러나 엘리다에게는 결혼 전 바다에서 만난 한 선원과의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결합을 약속했으나 남자는 떠났고 엘리다는 뒤에 방엘과 결혼했다.
세월이 흘러 그 선원이 다시 나타나 엘리다에게 함께 떠나자고 한다. 엘리다는 과거의 약속과 현재의 결혼 사이에서 갈등한다. 남편 방엘은 처음에는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만 마침내 강제로 붙들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엘리다에게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준다. 자신과 가정에 남을 수도 있고 선원을 따라 떠날 수도 있으며 그 결정은 오직 엘리다 자신의 것이라고 한다. 선택의 자유를 얻은 엘리다는 오히려 옛 애인을 따라가지 않고 가정에 남기로 한다. 노신은 이 작품을 노라의 경우와 함께 거론하면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떠나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임을 생각하게 한다.
《인형의 집》이라는 제목에서 말하는 ‘인형’은 노라의 삶을 상징한다. 노라는 마지막에 남편과 대화하면서 자신이 아버지의 집에서는 아버지의 인형 같은 아이였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의 인형 같은 아내였다고 돌아본다. 자신 생각보다 아버지와 남편의 생각에 맞추어 살아왔으며 집과 결혼생활은 자신이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 끝에, 노라는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교육하고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가출한다.
阿爾志跋綏夫問/黃金世界何時來의 아르치바셰프(阿爾志跋綏夫 1878~1927)는 러시아 소설가 미하일 아르치바셰프(Mikhail Artsybashev)이다. 그의 작품에는 당시 러시아 사회의 어두운 현실과 정신이 퇴폐한 사람들의 생활이 많이 나타난다. 10월혁명(十月革命) 뒤에는 국외로 망명했으며 바르샤바에서 죽었다.
노신이 이 글에서 언급한 내용은 아르치바셰프의 소설 《노동자 수이후이뤼에푸(工人綏惠略夫 Shevyryov)》 제9장에 나온다. 작품에서 수이후이뤼에푸는 야라제푸에게 미래의 황금세계를 위해 현재의 사람들이 희생되는 문제를 따져 묻는다. 사람들은 미래의 후손에게 아름다운 사회를 마련해 주겠다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줄 것인가!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현재의 고통을 보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황금세계(黃金世界)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갈 이상 사회를 뜻하지만, 그 세계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지금 굶주리는 사람에게 당장의 한 끼를 주지는 못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사람이 끝없이 참고 희생해야 한다면 그 이상은 현재의 인간에게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노신은 이 문제를 노라의 현실과 연결한다. 앞으로 이루어질 이상 사회를 말하는 것과 오늘 당장 한 여성이 자기 힘으로 먹고사는 문제는 서로 다른 차원의 일이다.
玉樓赴召猶自慰의 옥루부소(玉樓赴召)는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0~816)의 죽음에 얽힌 고사이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평생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스물일곱의 나이로 죽었다. 〈이하소전(李賀小傳)〉에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기이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하의 죽음 직전에 대낮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용을 타고 나타나 손에 판 하나를 들고 이하를 부르러 왔다. 이하는 늙고 병든 어머니가 있으므로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사자는 상제(上帝)가 백옥루(白玉樓)를 완성하여 이하에게 그 기문(記文)을 짓게 하려고 부르는 것이며 하늘은 즐거운 곳이라 괴롭지 않다고 말했다. 이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현실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천재가 죽어서는 하늘의 부름을 받아 백옥루의 글을 짓는다는 이야기이다. 인간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하늘에서는 그의 문재(文才)를 알아주었다는 위안도 담겨 있다. 노신은 사람이 현실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할 때 이러한 꿈과 이야기가 차라리 위안이 될 수 있음을 말하면서 이 고사를 끌어왔다.
阿哈斯瓦爾受詛의 아하스와르(阿哈斯瓦爾 Ahasverus)는 유럽에서 오랫동안 전해 온 ‘방랑하는 유대인’ 전설의 인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끌려가던 도중 그의 집 앞에서 잠시 쉬려 했는데 아하스와르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예수를 내쫓았다. 그 때문에 그는 예수가 다시 세상에 올 때까지 죽지도 쉬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돌아야 하는 저주를 받았다. 죽음으로 고통을 끝낼 수도 없이 끝없이 살아가야 하는 인물인 셈이다. 노신은 삶과 죽음, 꿈과 현실을 논하는 과정에서 이 전설을 끌어왔다.
涸轍鮒魚求滴水의 학철지부(涸轍之鮒)는 전국시대 장주(莊周)의 우화로 《장자(莊子)·외물(外物)》에 나온다. 장주의 집이 가난하여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리러 가자, 감하후는 곧 봉읍의 세금을 받게 되면 삼백 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장주는 이에 오는 길에 수레바퀴 자국에 갇힌 붕어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붕어는 자신에게 한 말이나 한 되 정도의 물을 주어 살려 달라고 했다. 장주가 남쪽 오월(吳越)의 왕을 찾아가 서강(西江)의 큰물을 끌어다가 주겠다고 하자 붕어는 화를 냈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목숨을 이어 줄 얼마 안 되는 물인데 훗날 거대한 강물을 가져다주겠다고 하니 그때에는 이미 죽어 마른 생선을 파는 가게에서 자신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당장 죽게 된 붕어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의 서강이 아니라 지금의 한 말이나 한 되의 물이다. 노신은 이 우화를 현실의 인간에게 적용한다. 이상 사회가 언젠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그날까지 굶고 있을 수 없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우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의 조건이 필요하다. 노라에게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여성 해방을 기다리는 것보다 당장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경제 기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菩提樹下思救世의 보리수(菩提樹)는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나무이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보고 스물아홉 살에 출가하여 여러 곳에서 수행했다. 6년 동안 고행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다가 보리수 아래에 앉아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한다면 몸이 부서지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마침내 깊은 사색 끝에 번뇌를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노신은 보리수의 이야기를 매우 현실의 비유 속에 끌어온다. 추운 겨울에 솜옷 한 벌밖에 없는 사람이 눈앞에서 추위에 떠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옷을 벗어주면, 자신이 추위에 떨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마음에 걸린다. 이때 보리수 아래에 앉아 온 인류를 구제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솜옷도 잃지 않고 인류를 구한다는 큰 뜻도 품을 수 있다. 이 역설에는 눈앞의 한 사람을 돕지 않으면서 천하의 구제를 말하는 태도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들어 있다.
青皮齷齪拳匪後의 권비(拳匪)는 1900년 경자년(庚子)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을 당시 지배계급과 제국주의자들이 멸시하여 부른 말이다. 의화단에는 중국 북부의 농민과 수공업자, 수륙 운송 노동자, 병사 등 많은 민중이 참여했다. 이들은 권회(拳會)를 조직하고 권법과 봉술을 익혔기 때문에 권민(拳民)이라 불리기도 했다.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의화단 사건 뒤 천진(天津)의 청피(青皮)에 관한 이야기이다. 청피는 당시 거리의 건달이나 무뢰배를 일컫던 말이다. 노신은 이들이 짐을 나르는 일을 하면서 보여 준 행동을 예로 들었다. 작은 짐이라도 정한 돈을 요구하고 거리가 가까워도 요구를 쉽게 거두지 않았으며 상대가 거절해도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노신은 청피가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실과는 별개로 한 번 요구한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질긴 힘을 주목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힘을 인내하며 오래 싸우는 능력, 곧 인성(韌性)의 한 예로 보았다.
客笑觳觫豈所待의 곡속(觳觫)은 두려워 벌벌 떠는 모습을 뜻한다.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에 제선왕(齊宣王)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나는 그것이 두려워 벌벌 떠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吾不忍其觳觫)고 한 데서 알려진 말이다. 노신의 글에서는 이 말이 희생을 바라보는 군중과 연결된다. 희생되는 사람이 의연하고 장렬한 모습을 보이면 구경하는 사람들은 비장한 연극을 보듯 감동한다. 반대로 희생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여 벌벌 떨면 사람들은 우스운 연극을 보듯 바라본다. 어느 경우든 희생자의 죽음과 공포는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볼거리가 된다. 희생자가 장렬하게 죽는다고 해서 관객이 반드시 깨어나는 것도 아니며,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그 고통을 자신 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노신은 바로 이러한 군중의 모습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自由前提何優先/住也去也唯經濟는 이러한 여러 이야기가 다시 노라의 현실로 돌아오는 대목이다. 노신이 보기에 여성의 자유에서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경제권이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생활을 모두 의존하면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기는 어렵다. 노라가 집을 나갔다고 해도 스스로 생활할 수 없다면 그 자유는 곧 막다른 길에 이를 수 있다. 반대로 집에 남더라도 경제와 생활에서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남는다면 강제로 예속되어 남는 것과는 다르다. 노신이 경제권을 강조한 까닭은 자유를 관념이 아니라 실제 생활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一時犧牲但驚動/韌韌鬪爭唯打開에 이르면 문제는 개인의 희생과 사회 변화로 넓어진다. 노신은 한 번의 장렬한 희생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잠시 감동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사회가 바뀐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앞에서 말한 관객은 장렬한 죽음을 비극처럼 보고 두려움에 떠는 죽음을 희극처럼 보면서 곧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노신이 중요하게 본 것은 인성(韌性), 곧 쉽게 끊어지지 않고 오래 버티는 질긴 힘이다. 천진청피의 행실 자체는 천박하고 거칠지만, 자신이 요구한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그 질김에는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고 보았다. 자유와 권리는 한 번의 장렬한 행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조금씩 요구하고 얻어 내며 다시 빼앗기지 않도록 오래 버티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娜拉走後怎樣〉은 《인형의 집》의 결말에 대한 단순한 후일담이 아니다. 노라가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입센이 쓰지 않은 현실을 노신이 이어서 묻는 글이다. 정신의 각성만으로 자유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며 자유를 지탱하려면 경제권이 필요하다. 미래의 황금 세계를 말하면서 현재의 굶주림을 외면해서도 안 되고 한 번의 장렬한 희생으로 군중이 모두 깨어날 것이라 기대해서도 안 된다. 결국 현실을 바꾸는 힘은 살아남으면서 자신의 권리를 끈질기게 요구하고 오래 싸우는 데 있다는 것이 노신이 이 글에서 말하려 한 중요한 뜻이다.
이 시는 이러한 노신의 글을 海上夫人에서 娜拉 阿爾志跋綏夫 玉樓赴召 阿哈斯瓦爾 涸轍鮒魚 菩提樹 青皮 觳觫을 거쳐 經濟와 韌韌鬪爭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압축해 옮긴 것이다. 각각의 말 뒤에 놓인 이야기와 원전을 함께 읽어야 시의 흐름도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이렇게 어렵게 구성한 데에는 시가 본래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많은 전고와 성어를 끌어와 압축하면 시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작품 자체로 보여 주려는 것이다. 한 구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주석을 찾고, 그 주석을 이해하기 위해 원전까지 찾아야 한다면 과연 그것이 좋은 시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쉽게 읽히지 않는 시를 만들어 놓고 오히려 ‘이렇게 쓰는 것이 과연 좋은 시인가?’를 되묻는 역설로 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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