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3. 釜馬民主抗爭記念日 부마민주항쟁기념일/대한신운·거(居)운
周雖舊邦命維新 (주수구방명유신)
주나라는 오래된 나라지만 천명 새로웠건만
維新憲法謀獨裁 (유신헌법모독재)
유신헌법은 도리어 독재를 꾀했네.
統一主體代議員 (통일주체대의원)
통일 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抑民體育館選擧 (억민체육관선거)
국민을 억누르는 체육관 선거
靑春野火燒不義 (청춘야화소불의)
청춘의 들불이 불의를 불사르니
十月人海參抗拒 (시월인해참항거)
시월의 사람 바다 항거에 동참했네.
民主主義轉換點 (민주주의전환점)
민주주의 전환점
長期執權終崩潰 (장기집권종붕궤)
장기 집권은 마침내 무너졌네.
* 거(居)운: 거, 게, 계, 녀(려, 례), 개, 괘, 쾌, 내(래), 대, 몌, 매, 서, 세, 새, 쇄, 어, 여, 예, 왜, 저, 제, 재, 처, 체, 채, 터, 태, 폐, 패, 허, 혜, 훼, 해
* 어릴 때 향리에서 제일가는 권력자는 막걸리 도가를 운영하던 아저씨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었기 때문이다. 순경마저 그에게 경례를 붙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민주주의가 최고의 선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누구나 마음껏 숨 쉬며 살 수 있는 사회는 보장해야 할 것이다. 30년 전 중국에 간 적이 있었는데, 당시 식사 자리에 공산당원 한 사람이 참석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좌중을 압도하는 위세가 느껴졌다. 독재와 민주주의를 거창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한 고을에 이런 사람이 한 명씩 변 사또 행세를 하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 그것이 독재와 민주주의의 차이일 것이다.
⇓ChatGPT Pro 감상평: 부마민주항쟁을 돌아보며(2026년 10월 12일)
10월 16일은 부마민주항쟁기념일이다.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날이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에 맞서 학생과 시민들이 함께 일으킨 저항으로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자유롭게 말하고 집회에 참여하며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선출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권리조차 온전히 보장받지 못했다.
1972년 박정희 정부는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유신(維新)은 본래 낡은 것을 고쳐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의 〈대아(大雅)·문왕(文王)〉에 나오는 주수구방(周雖舊邦) 기명유신(其命維新)이라는 구절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지만 그 천명은 새로워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이름과 달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하고 권력을 한곳에 집중시켰다. 대통령의 중임 제한이 없어졌고,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수 없게 되었다. 언론과 집회·결사의 자유도 크게 제한되었다.
특히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간접선거는 유신체제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국민이 선출한 대의원들이 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형식상 선거 절차는 존재했지만,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 더욱이 대통령에게는 긴급조치권과 국회의원 일부에 대한 사실상의 선임권까지 부여되어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 크게 약화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불만은 더욱 높아졌다.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 여건이 있었다. 1979년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과 강제 진압 야당 지도자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 등은 정치 갈등을 더 격화시켰다. 정치의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생활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불만이 함께 쌓여 갔다.
마침내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체제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처음에는 학생들의 시위였지만 곧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항쟁의 규모가 커졌다. 18일에는 마산의 경남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들이 일으킨 저항이 지역사회의 폭넓은 항쟁으로 번진 것이다. 부산과 마산이라는 두 도시의 이름을 따서 부마민주항쟁이라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정부는 10월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20일에는 마산과 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군 병력이 투입되고 시위 참가자들이 연행되면서 항쟁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군사력으로 거리의 시위를 멈추게 할 수는 있었어도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부마민주항쟁은 당시 정권이 직면한 정치 위기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항쟁이 시작된 지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18년에 걸친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다. 부마민주항쟁이 10·26 사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유신체제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정권의 위기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다. 학생과 시민들의 저항이 국가 권력의 향방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상의 의미가 크다.
그러나 유신체제의 종말이 곧 민주주의의 완성을 뜻하지는 않았다. 1980년 신군부의 권력 장악과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을 거쳐야 했으며,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르러서야 대통령 직선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에서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을 잇는 중요한 고리로 자리한다.
부마민주항쟁이 남긴 교훈은 민주주의가 단순히 선거를 치르는 제도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거가 존재하더라도 국민의 선택권이 제한되고, 언론이 권력을 비판할 수 없으며,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억압된다면 민주주의의 본뜻을 온전히 실현했다고 보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력의 주인이라는 원칙 위에서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정치 참여,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함께 이루어질 때 유지될 수 있다.
또한 부마민주항쟁은 민주주의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었다. 역사를 바꾸는 힘은 반드시 이름난 정치 지도자나 권력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거리로 나선 학생들과 생업에 종사하던 평범한 시민들이 함께 뜻을 모았을 때 거대한 권력도 흔들릴 수 있었다. 이들의 참여는 민주주의가 국민의 일상과 삶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2019년 정부는 10월 16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다. 항쟁이 일어난 지 40년 만의 일이었다. 이는 부마민주항쟁을 부산과 마산만의 지역사로 남겨 두지 않고, 온 국민이 기억해야 할 민주주의의 역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47년이 지났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대통령 직선제와 국민의 기본권을 헌법으로 보장하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나 제도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저절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려 할 때 이를 감시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며, 누구나 두려움 없이 자신 뜻을 밝힐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부마민주항쟁을 기념한다는 것은 지나간 사건을 되새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유와 권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돌아보고, 그 가치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이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거리에서 울려 퍼진 민주화의 함성은 민주주의가 결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국민의 참여와 책임 속에서 지켜 나가야 할 소중한 가치임을 오늘도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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