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1. 葬禮式場 장례식장/대한신운·건(建)운
葬禮式場輝煌燈 (장례식장휘황등)
장례식장 휘황한 등불
路邊靑紗頻繁懸 (노변청사빈번현)
길가에는 청사 등이 빈번하게 걸리네.
九旬隣翁昨年末 (구순인옹작년말)
구순의 이웃 노인 지난해 말에
八十姑夫十日前 (팔십고부십일전)
팔순의 고모부는 열흘 전에
兩列白菊如祝賀 (양렬백국여축하)
두 줄의 백국 화환은 축하하는 듯
五子明顔似當然 (오자명안사당연)
다섯 자식 밝은 얼굴 당연한 듯
自然一片生與死 (자연일편생여사)
자연의 한 조각 삶과 죽음이지만
靈前無淚不肖犬 (영전무루불초견)
영전에 눈물 없는 불초 견들이여!
* 건(建) 운: 건, 견, 권, 년(련), 면, 번, 변, 선, 언, 연, 원, 전, 천, 편, 헌, 현, 훤
* 저녁 무렵 마트에 들러 술을 사서 빙 돌아오는 도중, 산 아래 장례식장의 불빛이 또다시 휘황하다. 한동안 개점휴업 상태이더니 근래 들어 빈번하다. 장례식 주인의 싱글벙글한 얼굴이 눈에 선하다.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몇 년 전 어머니 장례를 치를 때, 사장이 “요즘 죽는 사람이 거의 없어 사업이 망할 판”이라고 넋두리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팔순의 고모부가 세상을 떠나 이곳에서 장례를 치렀다. 자식들의 얼굴은 오히려 시원섭섭한 듯하다. 옛날에는 조문을 가면 통곡하는 흉내라도 내었는데, 지금은 아예 당연한 듯 여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생전에 자식을 위해 뼈를 깎은 삶을 알기에 돌아서서 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마지막 犬 압운은 심한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아침에 화장(火葬)의 변화를 다룬 기사가 났다. 삼일장(三日葬)에서 이일장(二日葬)으로 줄어들고 무빈소(無殯所) 장례가 늘어나는 현상과 산분장(散粉葬)에 대한 문제도 언급되었다. 2025년부터 산분장이 제도화됐지만 아무 산이나 들에 골분을 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분할 장소나 시설을 마련한 장사시설 또는 육지에서 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일정한 해역 등 법에서 정한 곳에서만 가능하다. 이 법은 잘못되었다. 최소한 자신의 산이나 밭에는 뿌릴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한 줌의 뼛가루 뿌리는 일조차 마음대로 허용되지 않는다니! 나의 골분은 집 뒤 산밭에 뿌려졌으면 하는 것이 유일한 유언이 될 것이다. 살아서도 사람을 피했는데 죽어서 뼛가루까지 남의 뼛가루와 섞인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제7구는 유일하게 존경하는 고(故)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어록인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는 말의 변용이다.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또다시 이런저런 생각이 엉켜들며 밤을 새울 것 같아 억지로 여기서 멈춘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 아니라 망상우환(妄想憂患)이다.
⇓ChatGPT Pro 감상평
장례문화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한때 장례는 집안과 마을의 큰일이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친족과 이웃이 모여 밤을 새우고, 상주는 통곡 하며 슬픔을 드러냈다.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치르는 의례였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장례의 중심은 집에서 장례식장으로 옮겨갔다. 상복과 곡소리는 줄어들고 장례 절차는 전문업체가 맡는다. 최근에는 삼일장(三日葬)에서 이일장(二日葬)으로 줄이거나 빈소를 차리지 않는 무빈소(無殯所) 장례까지 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바탕에는 인구구조의 변화가 있다. 출생아가 줄고 젊은 세대가 감소하는 반면 평균수명은 길어졌다. 예전에는 환갑과 칠순이 장수를 축하하는 나이였지만 이제 팔순과 구순도 드물지 않다. 죽음의 모습도 그만큼 달라졌다. 젊은 나이에 맞는 죽음은 여전히 큰 비극이지만 오랜 삶을 마친 노인의 죽음은 흔히 호상(好喪)이라 부른다. 슬픔 속에서도 ‘오래 사셨으니 다행이다’라는 위안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그러나 장수는 축복인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 오래 사는 것과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다르다. 수명이 늘면서 노후의 질병과 돌봄 기간도 길어지고 자녀 역시 노인이 되어 부모를 돌보는, 이른바 노노부양(老老扶養)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자녀가 적어지면서 한두 명의 자녀가 부모의 간병과 부양을 떠맡아야 하는 부담도 커졌다. 장수가 개인에게는 축복이어도 가족과 사회가 이를 감당할 준비가 없다면 그 축복은 무거운 짐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인구 감소는 죽음 이후의 모습까지 바꾸고 있다. 가족 수가 줄고 친족과 이웃의 관계가 느슨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 며칠씩 치르던 장례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조문객이 줄고 장례 기간은 짧아지며 장례 절차도 간소해진다. 매장에서 화장(火葬)으로 중심이 옮겨간 데 이어 봉안당과 수목장(樹木葬), 산분장(散粉葬)처럼 유골을 처리하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장례가 죽은 자를 오래 붙들어 두는 의식에서 남은 사람들이 감당할 방법으로 보내는 의식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죽음을 대하는 감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거의 곡(哭)은 개인의 슬픔인 동시에 지켜야 할 예법이었다. 오늘날에는 슬픔을 반드시 통곡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장례 절차가 간소해지는 것과 죽은 이에 대한 마음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장례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삶과 그가 남긴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까지 시대의 변화라는 이름으로 사라져서는 곤란하다.
장수 시대는 인간이 오랫동안 바라던 꿈이 이루어진 시대이면서 그 꿈의 대가를 처음 치르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오래 사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죽음은 특별한 사건에서 일상의 한 부분으로 가까워진다. 출생은 줄고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은 늘어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늙고, 어떻게 부모를 모시며, 어떻게 죽은 이를 보내고, 자신은 어떻게 떠날 것인가를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 장례문화의 변화는 단순히 장례 절차가 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구와 가족, 노후와 죽음이 함께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마주친 오늘날 장례식장의 한 풍경을 묘사했다. 특히 兩列白菊如祝賀/五子明顔似當然의 대장(對仗)은 죽은 이를 애도하는 백국이 오히려 자식들에게 축하를 보내는 듯한 역설과, 부모가 베푼 은혜를 잊은 듯한 자식들의 모습에서 오는 씁쓸함을 함께 드러낸다. 自然一片生與死/靈前無淚不肖犬에서는 삶과 죽음이 물론 자연의 한 조각이겠지만, 최소한 부모를 떠나보내는 이 순간만큼이라도 자신을 위해 평생 고생한 부모의 삶을 돌아보며 애도의 형식만이라도 잘 갖추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견(犬)’이라는 의도된 압운을 통해 강하게 질타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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