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5. 世界韓人之日 세계한인지일/대한신운·기(基)운
海外定着開拓史 (해외정착개척사)
해외 정착 개척의 역사
初期移住不可避 (초기이주불가피)
초기의 이주는 불가피했으리!
苛斂誅求難堪耐 (가렴주구난감내)
가렴주구는 감내하기 어려웠고
貧困飢饉無奈移 (빈곤기근무나이)
빈곤 기근에 어쩔 수 없이 이주했네.
他國試鍊豈盡言 (타국시련기진언)
타국의 시련을 어찌 다 말하랴!
故鄕哀愁夢中懷 (고향애수몽중회)
고향의 애수는 꿈속에서도 품었으리!
世界萬方七百萬 (세계만방칠백만)
세계만방 칠백만
韓人矜持自省時 (한인긍지자성시)
한국인의 긍지를 자성해 보는 때
* 기(基)운: 기, 괴, 귀, 니(리), 미, 비, 시, 씨, 이, 외, 의, 지, 치, 취, 피, 희, 회, 휘
* 세계 한인의 날을 맞아 이주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온갖 고난을 이겨낸 한국인의 저력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후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잘 지켜 나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고자 했다.
⇓ChatGPT Pro 감상평
오늘날 세계 181개국에는 약 700만 명의 한인이 뿌리내려 살아가고 있다. 세계 한인의 날을 맞으면 이처럼 세계 곳곳에 뿌리내린 한인들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세계에 흩어진 한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시작부터 자랑과 영광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늘의 넓은 한인 사회가 있기까지 그 첫길에는 가난과 기근,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눈물이 함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인의 본격 해외 이주는 19세기 후반부터 두드러졌다. 조선 말 세도정치 아래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가 이어졌고, 흉년까지 겹치면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북부 지역 농민 가운데 일부가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1863년에는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연해주 포시예트(Посьет) 지역에 정착해 지신허(地新墟) 마을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69년 큰 흉년 뒤에는 만주와 연해주로 향하는 사람이 더 늘었다. 이들에게 국경을 넘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해외 진출이라기보다 우선 살아남기 위한 선택에 가까웠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한인의 이주는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1902년 12월 22일 첫 공식 하와이 이민단이 제물포를 떠나 나가사키로 향했다. 그곳에서 신체검사를 거친 뒤 갤릭호(S.S. Gaelic)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들어갔다. 이후 1905년까지 수천 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낭만 어린 신천지가 아니라 사탕수수 농장의 고된 노동이었다.
후세에서는 이들을 흔히 해외 개척의 선구자라고 부른다. 결과를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낯선 땅에서 살아남고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를 세웠으며, 자녀를 교육해 다음 세대로 이어갔기 때문이다. 하와이 한인들은 농장마다 상호부조를 위한 동회(洞會)를 만들었고,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자 학교와 언론 등도 일구었다. 고된 노동으로 번 돈 가운데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개척이라는 후세의 말만으로 그들의 출발까지 아름답게 꾸며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훗날 자신이 해외 한인 역사의 선구자로 기록될 것을 생각하며 배에 오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굶주림을 피해 두만강을 건넜고, 어떤 이는 먹고살 길을 찾아 태평양을 건넜다. 떠남의 원인은 고통이었으나 그곳에서 살아남는 과정에서 비로소 개척이 시작됐다고 보는 편이 당시 사람들의 삶에 더 가까울 것이다.
더구나 고국을 떠났다고 해서 고향을 잊을 수 있었겠는가! 타국에서 겪은 시련만큼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컸을 것이다. 낮에는 낯선 땅에서 노동하면서도 밤이면 두고 온 부모와 형제, 고향의 산천을 꿈꾸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주자의 숫자와 이동 경로를 기록하지만, 시는 그 숫자 뒤에 있던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주의 역사는 개인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가 된다.
세대가 거듭되면서 이주의 성격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한 이동이 큰 몫을 차지했지만, 이후에는 유학·취업·사업·전문직 진출 등 여러 이유로 세계 각지에 한인이 정착했다. 초기 이민자가 피눈물로 건넜던 바다는 후손에게 일상의 생활공간이 되었고, 낯선 타국은 2세·3세에게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되었다. 그렇게 한인 삶의 영역은 세계 곳곳으로 넓어졌다.
이러한 역사를 생각하면 세계 한인의 날의 의미도 단순히 세계로 뻗어 나간 한국인을 자랑하는 날에 머물지 않는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선조의 고통을 기억하고 낯선 땅에서 삶을 일군 끈기를 되새기며 오늘을 살아가는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날이기도 하다. 세계 곳곳에 한인이 산다는 사실은 분명 놀라운 성취지만, 그 숫자만 자랑하기에 앞서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생각이 이 작품의 바탕에 놓여 있다. 海外定着開拓史라고 오늘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면서도 곧바로 初期移住不可避라 하여 초기 이주가 선택이라기보다 불가피한 삶의 방편이었음을 짚었다. 苛斂誅求難堪耐/貧困飢饉無奈移에서는 가렴주구와 빈곤·기근을 이주의 배경으로 놓았고, 他國試鍊豈盡言/故鄕哀愁夢中懷에서는 역사 기록이 다 담지 못하는 이민자의 시련과 향수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헤아렸다. 마지막 世界萬方七百萬/韓人矜持自省時는 오늘의 세계 한인을 무조건 찬양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선조가 물려준 삶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후세가 과연 한국인의 긍지와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게 한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언어의 진술이 자연스럽다는 데 있다. 初期移住不可避는 초기의 이주는 불가피했다, 貧困飢饉無奈移는 빈곤과 기근에 어쩔 수 없이 이주했다, 他國試鍊豈盡言은 타국의 시련을 어찌 다 말하랴! 라는 일상의 생각을 거의 그대로 칠언(七言)에 담았다. 평측에 억지로 말을 맞추기 위해 어순을 뒤집거나 뜻을 희생하지 않았기에 한자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우리말의 흐름을 따라 그 뜻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누구라도 이와 같이 일상의 언어를 바탕으로 자신 생각을 쉽게 시로 나타낼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자연스럽게 진술하면서도 칠언의 리듬과 압운을 갖추는 것, 그래서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익혀 자신 생각을 시로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대한신운(大韓新韻)이 지향하는 장점이며 이 작품은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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