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운

100. 성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老人一快事 노인의 유일한 즐거움/우리 한시를 써야 하는 까닭

대한신운 2025. 5. 24. 07:57

100. 老人一快事 노인의 유일한 즐거움 효향산체(效香山體) 백거이(白居易) 체를 본받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老人一快事 노인의 유일한 즐거운 일

노인일쾌사

縱筆寫狂 붓을 휘둘러 미친 듯한 조선 시를 쓰는 일

종필사광

競病不必拘 병폐의 경쟁에 구속될 필요 없고

경병불필구

推敲不必 퇴고에도 지체할 필요가 없네.

추고불필

興到卽運意 조선 시는 흥이 나면 즉시 그 뜻을 옮기고

흥도즉운의

意到卽寫 뜻이 떠오르면 바로 그 뜻을 옮길 수 있네.

의도즉사

我是朝鮮 나는 조선인

아시조선

甘作朝鮮 기꺼이 조선 시를 짓겠노라!

감작조선

卿當用卿法 경은 당연히 경의 법을 사용하면 그만이지!

경당용경법

迂哉議者 오활하다고 의론하는 자 누구인가!

우재의자

區區格與律 자질구레한 격률

구구격여률

遠人何得 먼 나라의 사람이 어찌 체득하여 알 필요가 있겠는가!

원인하득

凌凌李攀龍 오만한 이반룡이라면

嘲我爲東 나를 조롱하며 동쪽 오랑캐라 여기겠지!

능릉이반룡

袁尤槌雪樓 원굉도가 특히 백설루에서 이반룡의 주장을 배격하니

원우퇴설루

海內無異 천하에서 이견이 없었다네.

해내무이

背有挾彈子 나의 말에 등 돌리고 겨우 새총의 알 정도를 끼우고

배유협탄자

奚暇枯蟬 어찌 한가하게 매미껍질 같은 문장이라 노려보는가!

해가고선

我慕山石句 나는 백거이의 산 돌 같은 맹세 구를 그리워하는데

아모산석구

恐受女郞 아마도 소녀의 비웃음 받을까 두려워했으리라!

공수녀랑

焉能飾悽黯 이에 처량하고 암담한 심정을 나타낼 수 있었으니

언능식처암

辛苦斷腸 이별의 괴로움과 창자 끊는 표현이 되었다네.

신고단장

梨橘各殊味 배와 귤은 각각 맛이 다르듯이

리귤각수미

嗜好唯其 기호에 따르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네.

기호유기

 

* 효향산체(效香山體): 백거이 체를 본받다.

* 背有挾彈子, 奚暇枯蟬窺: “그들은 내가 쓴 시를 평측도 안 맞고, 전통 격률에 어긋난다며 마치 껍데기뿐인 매미 허물 같은 문장이라 조롱한다. , 정약용은 격률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당하는 대상이며, 그 공격자들의 시선과 시비를 풍자한 말이다. 매미껍질 같은 문장은 유가들이 정약용의 시를 평가절하하며 부르는 모욕적 표현으로 정약용은 그 시선을 인용해 풍자한 구이다.

* 이반룡(李攀龍 15141570): 고문(古文격률시·사대부적 시풍의 형식과 전고(典故)를 강박적으로 추종. 형식을 절대시하고, 내용보다 격식에 집중. 정약용은 실학자로서 진실한 감정, 현실에 기반한 시 정신을 중시했으며, 중국의 격률 형식주의와 전고 숭배 중심 문풍을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다. 따라서 凌凌李攀龍이란 말은 단순한 언급이 아니라, “뻣뻣하고 으스대는 이반룡 같은 작자들!”이라는 강한 조롱이 담긴 표현이다. 嘲我爲東夷 내 시를 동이(東夷)의 졸렬한 시라 조롱했지” , “격률 따위로 나를 낮춰 보는 자들이 바로 이반룡 같은 자들이다라는 강한 반격과 풍자의 정조가 드러난다.

* 설루(雪樓): 명대 문인 袁宏道(원굉도 1568~1610)와 그의 문학론을 상징하는 대표적 장소인 백설루(白雪樓)를 가리킨다. 백설루는 원굉도가 독서하고 창작하던 누각으로 그곳에서 시를 쓰고, 문학 담론을 벌이며, 전통 시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문학 정신을 주장했다. 性靈說(성령설)로 문학은 자신의 성정’(마음의 감정, 기질)의 표현이어야 하며, 자기 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락 주장했다.

* 我慕山石句, 恐受女郞嗤: 이 시의 핵심 구절로 백거이의 생애를 관통한 사랑 이야기로 조선 시를 써야 할 근거로 삼았다.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당나라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는 현실을 노래했고, 백성을 위로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에 솔직한 시를 남긴 사람이었다그의 시는 당대 최고의 유행가였고, 어린아이부터 이민족 병사까지도 그의 <비파행(琵琶行)>을 따라 읊을 수 있을 만큼 평이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말년에 향산거사(香山居士)”라는 호를 쓰며, 평측을 배제한 꾸밈없는 시풍을 남겼고, 훗날 후인들은 그의 시풍을 일러 향산시체(香山詩體)”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그 평이하고 절절한 시 속에는 늘 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 이름은 상령(湘靈), 어린 시절 그가 사랑했고, 세상을 다 얻고도 끝내 함께하지 못한 단 한 사람이다. 백거이가 열한 살 무렵, 전란을 피해 가족과 함께 부리(符離)라는 고장으로 이주해 살게 되었다. 그곳 이웃에 살던 평범한 농가의 딸 상령은, 눈망울이 밝고 웃음이 맑은 소녀였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뛰노는 것도, 개울에서 징검다리를 밟는 것도, 들판에서 꽃을 꺾는 일도 함께했다. 구별이 없었다. 단지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였던 시절, 사랑은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시간이 흘러 백거이는 장안으로 유학을 떠나 과거에 급제하고, 시단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몇 해 뒤, 고향에 돌아온 그가 어느 날 동쪽 들길을 걷다 마주친 한 소녀는 그의 기억 속에서 장난기 많던 아이 상령과 너무나 달랐다.

居易哥, 돌아오셨어요?” 그의 심장은 그 순간, 말없이 고백하고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사랑, 그러나 말로 다 전하지 못한 감정들. 이후 백거이는 상령을 위해 많은 시를 썼다밤에는 뜬눈으로 지새우고, 낮에는 창밖을 응시했다.

庭前盡日立到夜 정원 앞에 종일 서 있다가 밤을 맞고

燈下有時坐徹明 어떤 날은 등불 아래 밤을 지새우네.

그러나 사랑은 늘 순탄하지 않았다. 문벌의 차이, 신분의 한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강한 반대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맹세로 이어졌다. 떠남,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거리. 백거이는 어머니를 따라 지방으로 떠났고, 그가 떠나는 날, 상령은 정성껏 만든 자수 신 한 켤레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이별 후에도 그리움은 점점 깊어만 갔다. 몇 해가 흘렀지만, 백거이는 상령을 잊지 못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매일 밤 그리워하며 꿈속에서도 그녀를 보고는 스스로에게 물었다그대는 어쩌다 다시 꿈에 왔는가(昨夜因何入梦来)?

유배지로 향하던 길, 백거이는 길가에서 상령과 재회한다. 그녀는 여전히 미혼이었고,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너무도 흘러버렸고, 이제 그녀는 말한다. “그대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셌고, 나는 눈썹마저 옅어졌습니다.” “그래도우리는 변하지 않았지요.” 이후, 그녀는 머리를 깎고 불문에 귀의한다.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는 단 한 줄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심여사회(心如死灰)" 이미 마음은 다 타서 재가 되었습니다. 달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린 이름. 그녀가 떠난 뒤, 백거이는 그녀를 향한 그리움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현실과 타협해 결혼하게 되지만,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백거이는 다시 그 마을을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시 속에는 여전히 그녀가 살아 있었다. 내 그리워하는 이는 멀리 있고, 마음 닦는 법도 익히지 못했으니, 이 마음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장한가(長恨歌)에서 백거이는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이렇게 맺는다.

在天愿作比翼鸟 다음 생애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地愿为连理枝 다음 생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장한가의 이 마지막 구절은 사실 백거이가 상령과 이루지 못한 사랑을 시로 다시 살아나게 한 구절이다. 그는 황제의 사랑을 노래했지만, 그가 평생을 품고 쓴 사랑은, 바로 상령이었다.

정약용이 이 구를 인용한 까닭은 백거이가 까다로운 평측 규칙에 얽매였다면 진정한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라는 반문으로 진실한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조선 시를 쓰자는 주장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