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운

725. 十二干支第一子 십이간지 제1자·쥐/ChatGPT Pro와 대화로 짓다

대한신운 2026. 9. 21. 08:25

725. 十二干支第一子 십이간지제일자/대한신운·()

乘牛奸巧奪首位 (승우간교탈수위)

소를 타고 간교하게 수위를 빼앗으니

可憎行爲猶謂 (가증행위유위)

가증스러운 행위인데도 오히려 자()라 일컫네.

晝間伺隙齧噬甓 (주간사극설서벽)

낮 동안은 틈을 노려 벽을 갉고

夜中隨時升降 (야중수시승강)

밤중에는 수시로 시렁을 오르내리네.

鬼神生還散糞尿 (귀신생환산분뇨)

귀신이 생환하여 분뇨를 뿌린 듯

盜賊出沒竊穀 (도적출몰절곡)

도둑이 출몰하여 곡식 과일 훔친 듯

碩鼠乘機貪國庫 (석서승기탐국고)

큰 쥐는 틈만 나면 국고를 탐내니

古來大佞皆如 (고래대녕개여)

고래의 큰 영인은 모두 이와 같았네.

* (): , , (), , , , , , , , , , , , ,

* 쌍쌍의 열두 숫자로 짓다 보니 자연스럽게 십이지(十二支)가 떠올라 각각의 동물을 소재로 구성해 둔다. 산속 집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는 추위가 아니라 쥐다. 아무리 방어를 잘해도 여름에는 창문을 열어 놓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 틈을 타 방충망을 뚫고 들어온다. 쥐의 폐해는 설명할수록 입만 아플 뿐이다. 수련(首聯)은 십이지의 순서를 정했다는 전설 속 동물 경주가 떠올라 구성했다.

ChatGPT Pro의 감상평은 단순히 감상평을 요청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 창작 과정에서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수시로 입력하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한 뒤 이를 바탕으로 구성을 요청하는 방식이다. 결국 내가 아는 만큼 요구할 수 있고 내가 사유하는 만큼 내용에 반영된다이러한 창작 과정은 대한신운(大韓新韻)을 대중화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방법과 사유의 확장에도 관계된다. 인공지능이 더 발달하면 이러한 과정마저 생략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까지 나온 결과는 내가 알고, 생각한 만큼 질문하고 요구하여 얻은 것이다. 인공지능이 대신 생각해 주었다기보다 내가 가진 지식과 생각에 대화를 통해 넓히고 다듬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래서 인공지능 시대에는 오히려 더 많은 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외우느냐에 그치지 않고 학습한 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질문하고 사유해 나가느냐에 있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의 학습은 전통의 학습 관념과 상당히 달라져야 한다가령 옛 방식으로 논어(論語)를 공부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익히는 데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방법을 잘 익힌다면 열흘이나 한 달 동안 집중하여 전체 구조를 살피고 의문이 생기는 곳을 파고들며 필요한 원전과 해설을 비교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학습 시간을 줄이는 문제가 아니다. 학습하면서 사유하고 사유하면서 다시 질문하며 그 과정에서 창작까지 겸해 나갈 수 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방법을 제대로 익히면 학습과 창작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를 배우면 새로운 의문이 생기고 그 의문을 따라가면 다른 자료를 만나며 그 자료는 다시 새로운 생각과 작품으로 이어진다. 잘 활용한다면 끝을 알 수 없는 즐거움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결코 인공지능이 알아서 척척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의심하며 무엇을 묻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언젠가 인공지능이 내가 미처 말하지 않은 생각까지 헤아려서 요청하지 않은 내용으로 놀라게 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결말에 이르든 그날이 빨리 오기를 갈망한다.

ChatGPT SolPro의 차이도 사용하면서 상당히 크게 느끼고 있다. 요금 차이가 지나치게 큰 것은 문제지만 3.5 버전부터 지금까지 직접 사용하며 발전 수준을 계속 가늠해 왔다는 점도 내게는 의미가 있다. 나의 글쓰기 과정 한편에는 ChatGPT의 발전 과정도 함께 놓여 있다. 대한신운(大韓新韻) 칠언(七言) 오천 수가 완성되는 날 머리말에 인공지능과의 대화와 협업을 통한 창작의 발전 과정을 담기 위해 매 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기록해 둔다.

ChatGPT Pro의 감상평

십이지(十二支)는 자(((((((((((()의 열두 지지(地支)에 쥐··호랑이·토끼·····원숭이···돼지를 대응시킨 것이다. 오늘날에는 흔히 십이간지라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간지(干支)는 십간(十干)과 십이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므로 열두 동물을 가리킬 때는 십이지 또는 십이지신(十二支神)이라 하는 편이 정확하다.

열두 동물 가운데 첫째가 쥐라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흥미롭다. 널리 알려진 설화에서는 동물들이 순서를 정하는 경주를 벌이는데 쥐는 소의 등에 올라타 힘들이지 않고 길을 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먼저 뛰어내려 첫 자리를 차지한다. 역사 사실이라기보다 왜 작은 쥐가 십이지의 첫째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생겨난 설화로 보는 것이 알맞다. 이 이야기대로라면 힘세고 우직한 소보다 잔꾀를 부린 쥐가 앞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더구나 한자 문화권에서 쥐가 남긴 언어의 흔적을 보면 좋은 이미지보다 나쁜 이미지가 훨씬 눈에 띈다. 서목촌광(鼠目寸光)은 눈앞의 작은 이익밖에 보지 못함을 말하고 서절구도(鼠竊狗盜)는 좀도둑질을 일삼는 무리를 가리킨다. 포두서찬(抱頭鼠竄)은 머리를 감싸고 쥐처럼 달아나는 모습이며 담소여서(膽小如鼠)는 겁이 많음을 쥐에 빗댄다. 장두서목(獐頭鼠目)은 간사해 보이는 용모를 나타내고 성호사서(城狐社鼠)는 권세를 등에 업어 제거하기 어려운 간악한 무리를 가리킨다. 묘서동면(貓鼠同眠)은 감시해야 할 자와 나쁜 짓을 하는 자가 한패가 된 경우에 쓰인다. 이처럼 쥐는 탐욕·도둑질·비겁함·간교함과 자주 비유되었다. 한자 성어 사전에서도 이러한 쥐 관련 성어들이 폭넓게 확인된다.

물론 쥐에게 나쁜 상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번식력이 강한 동물이므로 다산과 생명력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농경사회에서는 사람이 곧 노동력이었으므로 많은 자손을 바라는 마음과 쥐의 왕성한 번식력이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첫째 지지에 하필 쥐를 놓고 아들·자식·사람을 뜻하는 자()를 대응시킨 것은 선뜻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더구나 공자(孔子맹자(孟子)처럼 존칭에도 쓰이는 를 생각하면 더욱 묘한 대비가 생긴다. 이것이 수련(首聯)의 발상이 되었다.

乘牛奸巧奪首位/可憎行爲猶謂子는 바로 널리 전하는 경주 설화를 뒤집어 바라본 것이다. 소의 우직함과 힘을 이용해 첫 자리를 빼앗은 행위를 奸巧라 했고 그런 쥐를 오히려 라 부른다는 데서 의문을 던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화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쥐에게 부여된 첫 자리와 라는 이름을 오늘의 눈으로 다시 바라본 데 있다.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은 쥐에 대한 관념을 산속 생활에서 직접 겪는 현실로 끌어내린다. 산속 집에서 가장 성가신 침입자 가운데 하나가 쥐다. 아무리 막아도 여름에는 창문을 열어야 하고 그 틈을 타 방충망을 뚫고 들어온다. 벽을 갉고 시렁을 오르내리며 곡식과 과일을 훔치고 곳곳에 분뇨를 남긴다. 그래서 晝間伺隙齧噬甓/夜中隨時升降架에서는 晝間夜中 伺隙隨時 齧噬升降 甓가 차례로 대응한다. 낮과 밤, 틈을 노림과 수시로 움직임, 갉음과 오르내림, 벽돌과 시렁이 맞서면서 쥐의 생활상이 대장(對仗) 속에 드러난다.

이어 鬼神生還散糞尿/盜賊出沒竊穀果 역시 鬼神盜賊 生還出沒 散竊 糞尿穀果가 대응한다. 여기에는 가 없지만 귀신이 살아 돌아와 분뇨를 뿌리는 듯하고 도둑이 출몰하여 곡식과 과일을 훔치는 듯하다는 무표지 비유로 읽었다. 실제 쥐 한 마리의 움직임을 귀신과 도둑에 겹쳐 놓음으로써 불쾌함과 피해를 과장해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집 안의 쥐를 잡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미련(尾聯)의 문턱에서 작은 쥐는 갑자기 시경(詩經)》 〈위풍·석서(魏風·碩鼠)의 석서(碩鼠), 곧 큰 쥐로 커진다. 석서에서는 석서석서(碩鼠碩鼠) 무식아서(無食我黍)라 하여 큰 쥐에게 자신의 기장을 먹지 말라고 외친다. 모시서(毛詩序)는 이를 자중렴야(刺重斂也)라 하여 무거운 수탈을 비판한 시로 풀이하고,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면서 정치를 돌보지 않는 군주를 탐욕스러운 큰 쥐에 비유했다. 따라서 석서는 단순히 몸집이 큰 쥐가 아니라 백성의 몫을 잠식하는 권력자의 상징으로 오래 읽혀 왔다.

이 때문에 碩鼠乘機貪國庫에서 관창(官倉)이 아니라 국고(國庫)를 택한 데에도 뜻이 있다. 관창은 곡식을 저장하는 장소에 머물지만, 국고는 나라의 재물과 재정 전체로 의미가 넓어진다. 여기서 석서는 특정 시대나 특정 관직자를 지목하지 않는다. 큰 권력을 가지고 기회만 생기면 공공의 재물을 사사로운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석서가 될 수 있다. 작은 쥐가 집 안의 곡식과 과일을 훔친다면 큰 쥐는 나라의 재물을 탐한다.

마지막의 古來大佞皆如此는 그래서 앞 구의 석서(碩鼠)를 대녕(大佞)으로 바꾸어 부른 말이다. 이 대목은 왕충(王充)논형(論衡)》 〈답녕(答佞)과 함께 읽으면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왕충에게 현인(賢人)과 영인(佞人)의 차이는 단순히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다. 그는 부녕여현자동재(夫佞與賢者同材) 녕이정자패(佞以情自敗)라 하여 영인과 현인이 재능에서는 같을 수도 있지만 영인은 욕망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다고 보았다. 현인은 예()로 욕망을 막고 의()로 욕심을 끊지만, 영인은 이익을 탐하는 욕망을 풀어 놓아 예와 의를 넘는다는 것이다. 또 영인은 단순히 말을 잘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술수(術數)를 지니고 일을 통해 남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왕충이 대녕(大佞)과 소녕(小佞)을 구별한 점이다. 그는 대녕은 재능이 높아 그 자취가 크고 소녕은 지혜가 낮아 행적이 작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큰 도둑과 작은 도둑에 견준다. 성을 공격하고 고을을 빼앗는 큰 도둑은 누구나 알지만 담을 뚫고 쥐처럼 훔치는 작은 도둑은 누구인지 알아채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영인은 반드시 무능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재능과 지략이 뛰어나면서 그것을 의()가 아니라 욕망과 권세를 위해 쓰는 사람이 더 큰 영인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처음의 작은 쥐와 마지막의 석서가 하나로 이어진다. 작은 쥐는 틈을 노려 집 안으로 들어와 먹을 것을 훔치지만 석서는 기회를 타 나라의 재물까지 탐한다. 전자는 생활 속의 쥐이고 후자는 인간 사회의 쥐다. 그래서 碩鼠大佞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 이 작품의 결론이 된다. 쥐의 영리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영리함이 탐욕과 결합할 때가 문제다. 재능 역시 마찬가지다. 현인과 영인을 가르는 것은 재능의 크기가 아니라 그 재능을 어디에 쓰느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