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운

726. 十二干支第二丑·십이간지 제2축·소/ChatGPT Pro와 대화로 짓다

대한신운 2026. 9. 21. 10:41

726. 十二干支第二丑·십이간지제이축·/대한신운·()

老子乘牛傳大道 (노자승우전대도)

노자는 소를 타고 대도를 전했으니

無爲利民顧犧 (무위이민고희)

무위로 백성을 이롭게 하는 희생을 돌아보네.

丑時反芻惜寸陰 (축시반추석촌음)

축시에 반추하며 촌음을 아끼고

終日牽犁遂長 (종일견리수장)

종일 쟁기 끌며 장정을 수행하네.

生前勞役救萬家 (생전노역구만가)

생전에는 노역으로 수많은 집을 돕고

死後皮肉盡使 (사후피육진사)

사후에는 가죽과 고기로 사명을 다하네.

對牛彈琴豈輕蔑 (대우탄금기경멸)

소에게 거문고 탄다고 어찌 소를 경멸하는가!

筋骨無休未習 (근골무휴미습)

근골이 쉴 새 없었으니 소리 익힐 수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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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이간지에서 당연히 일등을 차지해야 할 동물은 소이다. 십이지 순서를 정했다는 설화를 보면 천신의 판정부터 공정하지 않았으니 하물며 오늘날 인간 세계에서야! 부지런히 길을 나선 소의 등에 올라타고 가다가 결승을 앞두고 약삭빠르게 뛰어내려 먼저 들어온 쥐가 어찌 일등이겠는가! 묵묵히 제힘으로 끝까지 걸어간 소가 첫째 자리를 차지했어야 마땅하다.

어릴 때 내 집 누렁이는 동네에서 제일 큰 머슴이었다. 집에서 일을 부리고 나면 저녁에는 할머니가 반드시 가마솥에 콩깍지와 쌀겨나 보릿겨 등을 섞어 삶아 먹였다. 그런데 이웃집에 노역을 다녀온 날이면 침을 심하게 흘리며 신음했다. 빌려 간 김에 얼마나 심하게 부렸던 것인지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비유가 다소 심할지 모르지만, 오늘날 노동력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악덕 업주의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어릴 때는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동물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 자체가 희미했고, 학교에서도 동물 사랑을 가르칠 시절이 아니었다. 모두 먹고살기 바빴으며 소는 단지 부림의 대상이었다. 일 년에 소고기 한 근은 고사하고 돼지고기 비계조차 집마다 다행이었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세상에서 소의 고통까지 헤아릴 여유가 있었겠는가! 시제를 마주하니 문득 그 애잔한 모습이 떠올라 구성해 둔다.

ChatGPT Pro 감상평

십이간지에서 소는 두 번째인 축()에 해당한다. 십이지의 순서를 정했다는 설화에서는 소가 부지런히 길을 나섰으나 쥐가 소의 등에 올라타고 가다가 마지막 순간 먼저 뛰어내려 첫째를 차지한다. 묵묵히 제힘으로 길을 간 소보다 약삭빠르게 기회를 이용한 쥐가 앞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해학이 있다. 천신의 판정부터 공정하지 않았으니 하물며 인간 세계에서야 어떠하겠는가!

소는 힘이 세면서도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다. 농경사회에서는 밭을 갈고 수레를 끌며 짐을 날랐다. 풀을 먹고 되새김질하는 반추동물이며 살아서는 노동과 젖을 제공하고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까지 남긴다. 인간의 생활과 오랫동안 함께한 만큼 소와 관련된 말도 많다. 우보(牛步)는 느린 걸음을 뜻하고 우보천리(牛步千里)는 느려도 꾸준히 나아가는 끈기를 나타낸다. 노우지독(老牛舐犢)은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는 데서 부모의 자식 사랑을 나타내며 구우일모(九牛一毛)는 많은 것 가운데 극히 작은 하나를 뜻한다. 한우충동(汗牛充棟)은 책을 나르면 소가 땀을 흘리고 쌓으면 들보까지 찬다는 데서 많은 장서를 뜻하고 우도소시(牛刀小試)는 큰 재능을 작은 일에 시험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포정해우(庖丁解牛)는 오랜 숙련 끝에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경지를 나타내며 대우탄금(對牛彈琴)은 상대를 헤아리지 않은 말과 가르침의 허망함을 보여준다. 소 한 마리가 근면과 인내에서 사랑과 학문과 숙련과 처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간사의 비유가 되어 온 셈이다.

수련(首聯)老子乘牛傳大道/無爲利民顧犧牲은 노자(老子)가 소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는 전승에서 출발한다. 느리지만 묵묵히 제 길을 가는 소의 모습은 노자의 무위(無爲)와 자연스럽게 겹친다. 여기서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이롭게 하는 삶이며, 그래서 無爲 다음에 利民을 놓았다. 이어지는 顧犧牲은 소의 일생을 돌아보게 한다. 희생(犧牲)이라는 말 자체에도 본래 제사에 바치는 짐승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노자가 탄 소에서 시작하여 무위와 이민(利民)을 거쳐 희생에 이르는 흐름은 앞으로 전개될 소의 삶을 미리 제시한다.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은 소의 하루에서 일생으로 범위를 넓히면서 정교한 대장을 이룬다. 丑時反芻惜寸陰/終日牽犁遂長征에서는 丑時終日이 시간을 맞추고 反芻牽犁가 생태와 노동을 맞춘다. 惜寸陰遂長征에서는 짧은 시간과 긴 여정이 대응한다. 특히 寸陰長征의 대비가 눈에 띈다. 축시에 반추하는 것은 소의 생태이지만 작품에서는 낮에 일하느라 먹는 시간조차 아껴 밤에 되새김질한다는 의인화로 바꾸었다. 한 촌음까지 아끼며 쟁기를 끄는 하루하루가 긴 장정으로 이어진다. 는 단순히 계속한다는 뜻보다 맡은 일을 수행하여 이루어 간다는 의미가 있어 다음 경련의 生前死後로 넘어가는 연결고리가 된다.

生前勞役救萬家/死後皮肉盡使命에서는 대장이 더욱 분명해진다. 生前死後는 삶과 죽음을 맞세우고 勞役皮肉은 살아서 제공한 노동과 죽어서 남긴 몸을 대응시킨다. 救萬家盡使命은 그 결과를 받는다. 소의 일을 耕田 하나로 한정하지 않고 勞役이라 한 데에도 의미가 있다. 소는 밭을 갈았을 뿐 아니라 수레를 끌고 짐을 나르며 농가의 여러 일을 감당했다. 살아서는 노동으로 사람을 돕고 죽어서는 가죽과 고기까지 내어주니 盡使命이라는 표현이 소의 일생을 압축한다.

이러한 표현에는 어린 시절 집에서 기르던 소에 대한 기억도 배경으로 놓여 있다. 당시 농촌에서 소는 가족의 생계를 떠받치는 귀중한 재산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하는 존재였다. 특히 다른 집에 일을 다녀온 뒤 고통스러워하던 소의 모습이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 작품을 구성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개인의 기억은 여기서 길게 드러나지 않고 소의 勞役犧牲을 바라보는 정서의 바탕으로 작용한다.

미련(尾聯) 對牛彈琴豈輕蔑/筋骨無休未習聲은 앞의 여섯 구에서 묘사한 소의 삶을 인간 사회에 되돌려 놓는다. 대우탄금(對牛彈琴)은 전국시대 거문고의 명인으로 전해지는 공명의(公明儀)가 소를 앞에 두고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고상한 곡을 연주해도 소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소가 반응할 만한 소리를 내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본래 고사는 상대를 헤아리지 않은 채 자기 방식만 고집해서는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후대로 오면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에게는 소용없다는 뜻으로 널리 쓰였고 때로는 상대의 무지함을 낮추어 보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지점을 뒤집는다. 소가 거문고를 익히지 못한 까닭을 소의 우둔함에서 찾지 않고 筋骨無休에서 찾는다. 근육과 뼈가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면 거문고 소리를 익힐 겨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래서 未習聲은 능력이 없어서 익히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익힐 기회가 없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豈輕蔑이라는 반문도 여기서 힘을 얻는다.

이러한 반전은 소를 넘어 인간 사회로 확장된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학업을 포기한 사람도 있고 사회와 나라를 위해 희생했지만,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사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학력과 지위와 재능을 가진 사람이 더 큰 환영을 받는 경우가 인간사이다. 거문고를 능숙하게 타는 능력은 물론 가치가 있다. 문제는 그 거문고를 익힐 시간조차 없이 다른 사람의 삶을 떠받친 이들의 희생을 무능으로 오해하는 데 있다. 따라서 미련은 대우탄금이라는 익숙한 성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에게 거문고를 들려주고 알아듣지 못한다고 판단하기 전에 그 소가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지를 먼저 묻는다. 누가 거문고를 잘 타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누가 쟁기를 끌었고 누가 자신의 촌음을 내어 다른 사람의 삶을 떠받쳤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소는 십이간지의 둘째 동물에 머물지 않는다. 묵묵히 일하고 가진 것을 내어주면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삶을 상징한다. 수련의 無爲犧牲에서 시작하여 함련의 寸陰長征을 거치고 경련의 生前死後를 지나 미련의 對牛彈琴에 이르는 흐름도 한 방향을 향한다. 대우탄금(對牛彈琴)에서 돌아보아야 할 것은 거문고를 익히지 못한 소의 우둔함이 아니라 그 소가 거문고를 익힐 겨를조차 없었던 삶이다. 이제는 소가 거문고를 알아듣지 못했다고 탓하기보다 평생 근골을 쉬지 못했던 그 삶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