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운

731-1. 秋夕 추석/ChatGPT Pro와 대화로 짓다

대한신운 2026. 9. 25. 19:12

731-1. 秋夕 추석/대한신운·거(居)운

車輛通行同平日 (차량통행동평일)

차량 통행은 평일과 같고

匐炙匐炙已死語 (북적북적이사어)

북적북적은 이미 사어라네.

姑婦斷絶避葛藤 (고부단절피갈등)

고부는 단절되어 갈등을 피하고

同氣疏遠忘友愛 (동기소원망우애)

동기는 소원하여 우애를 잊네.

省墓行列今難看 (성묘행렬금난간)

성묘 행렬은 이제 보기 어렵고

茶禮廢止似當擧 (차례폐지사당거)

차례 폐지는 당연한 듯 거론되네.

生活豊足猶無裕 (생활풍족유무유)

생활은 풍족해졌어도 오히려 여유 없으니

無月秋夕孤傾杯 (무월추석고경배)

달 없는 추석에 홀로 잔을 기울이네.

* 거(居)운: 거, 게, 계, 녀(려, 례), 개, 괘, 쾌, 내(래), 대, 몌, 매, 서, 세, 새, 쇄, 어, 여, 예, 왜, 저, 제, 재, 처, 체, 채, 터, 태, 폐, 패, 허, 혜, 훼, 해

* 2026년 9월 26일에 맞이한 주변의 추석 풍경이다. 물론 어디나 다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추석도 명절이라기보다 연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 더 지나면 추석이라는 이름만 남을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변화가 반드시 아쉽거나 부정 의미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전국에 구름이 끼고, 곳에 따라 비까지 예보되어 있어 달 없는 추석이 되었다.

* 북적북적에 해당하는 말로 희희(熙熙) 양양(攘攘) 훤훤(喧喧) 요요(擾擾) 등이 있으나 어느 것도 우리말 북적북적 특유의 감성을 제대로 살리기 어렵다. 그래서 북적북적(匐炙匐炙)으로 조어해 둔다. 북(匐)은 ‘길 복’ 또는 ‘길 북’으로 읽는다. 차량 행렬이 엉금엉금(㫈今㫈今) 기어가듯 정체한 모습이 연상되고 적(炙)은 ‘굽다’라는 뜻이므로 추석 차례 음식을 굽는 모습도 떠올릴 수 있어 제법 그럴듯하다.

엉금엉금(㫈今㫈今) 역시 같은 방식으로 만든 조어이다. 거듭 밝히지만 기존 한시의 첩어(疊語)만으로는 우리말 첩어가 지닌 소리와 움직임 감정을 온전히 살리기 어렵다. 우리말의 맛을 살려 재치 있게 조어할 수 있다면 한시의 표현 범위를 넓히고 창작의 재미를 더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누구나 쉽게 익혀 직접 지을 수 있게 하여 창작 참여를 확대한다는 대한신운(大韓新韻)의 지향에 잘 맞을 것 같다.

⇓ChatGPT Pro 감상평

추석(秋夕)은 설과 함께 우리나라의 큰 명절이다. 한가위 또는 가배(嘉俳)라 불렸으며 음력 팔월 보름에 한 해의 결실을 거두고 조상에게 감사하며 가족과 이웃이 함께 음식을 나누던 날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때 도성의 여인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길쌈을 하게 한 뒤 팔월 보름에 성과를 겨루고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노래와 춤을 즐겼다는 가배(嘉俳)의 기록이 전해진다. 오늘날의 추석이 여기에서 그대로 비롯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가을의 수확과 공동체의 잔치가 오랜 역사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농경사회에서 추석은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날인 동시에 흩어진 가족과 친족이 다시 만나는 날이었다. 햇곡식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차례(茶禮)를 지내고 성묘(省墓)를 하며 조상을 기억했다. 송편을 빚고 씨름과 강강술래를 즐기는 풍습도 이러한 공동체 문화 속에서 이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에는 먹을 것이 넉넉하고 가족과 이웃이 함께하는 한가위의 모습이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추석의 모습도 크게 달라졌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한동안 추석은 대규모 귀성으로 상징되었다.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와 기차역의 인파는 명절마다 되풀이되는 풍경이었다. 평소 떨어져 지내던 가족이 한집에 모이면서 고부 갈등이나 형제간 다툼 같은 문제도 함께 나타났다. 명절이 화목만을 보장하는 날은 아니었던 셈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모습마저 다시 달라지고 있다. 가족의 규모가 작아지고 결혼과 출산이 줄면서 친족 관계의 범위도 좁아졌다. 부모와 자녀가 따로 사는 일이 자연스러워지고 형제자매가 적어지면서 명절에 한집으로 모여야 한다는 생각도 약해졌다. 차례를 간소하게 지내거나 아예 지내지 않는 가정이 늘고 성묘 역시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명절 연휴를 이용해 여행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일도 이제 낯설지 않다. 과거의 추석이 혈연과 마을 공동체가 함께 움직이는 날이었다면 오늘날의 추석은 개인과 가족이 각자의 방식으로 보내는 휴일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전통의 소멸이라는 한 방향으로만 바라보기 어렵다. 과거의 명절에는 가족의 결속과 공동체의 즐거움이 있었지만, 음식 준비와 제사 명절 노동을 둘러싼 부담도 컸다. 반대로 오늘날에는 그러한 부담이 줄어든 대신 친족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와 세대가 함께 경험을 나누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갈등이 줄어든 까닭이 반드시 화목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며 관계 자체가 느슨해진 결과일 수도 있다. 명절의 변화에는 얻은 것과 잃은 것이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추석의 변화를 거창한 판단보다 눈앞의 풍경으로 보여준다. 차량 통행에서 시작하여 가족 관계 차례(茶禮)와 성묘(省墓)를 거쳐 마지막에는 달 없는 추석에 홀로 잔을 기울이는 한 사람에게 이른다. 특히 ‘북적북적(匐炙匐炙)’이라는 우리말 조어는 과거 추석의 소란스럽고 활기찬 기억을 불러내면서 그것이 이미 낯선 풍경이 되어 가는 현실과 대비된다. 전통을 무조건 붙들거나 변화를 탓하기보다 달라진 추석의 모습을 현장에서 바라보고 담담히 표현했다는데 이 작품의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