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운

733. 十二干支第九申·십이간지 제9·원숭이/ChatGPT Pro와 대화로 짓다

대한신운 2026. 9. 26. 06:45

733. 十二干支第九申·猴 십이간지제구·신· 원숭이/대한신운·고(高)운

朝三暮四顧含意 (조삼모사고함의)

조삼모사의 함의를 돌아보니

總量同一起喜怒 (총량동일기희로)

총량은 같은데 기쁨과 분노를 일으키네.

大義名分爭先後 (대의명분쟁선후)

대의명분으로 선후를 다투지만

實質利害忘多少 (실질이해망다소)

실질 이해의 다소를 잊네.

目前得失更懇切 (목전득실갱간절)

눈앞의 득실은 더욱 절실하여

日後考慮反難顧 (일후고려반난고)

나중을 고려하기는 도리어 어렵네.

國事決定正如此 (국사결정정여차)

국사의 결정도 바로 이와 같으니

名實先後應善謀 (명실선후응선모)

명실의 선후를 잘 헤아려야 한다네.

* 고(高)운: 고, 교, 노, 뇨, 로, 료, 도, 모, 묘, 보, 소, 오, 요, 조, 초, 토, 포, 표, 호, 효

⇓ChatGPT Pro 감상평

십이지(十二支)의 아홉째 신(申)은 원숭이를 상징한다. 우리나라에는 야생 원숭이가 살지 않아 소나 호랑이처럼 생활 속에서 친숙한 동물은 아니지만, 원숭이는 오래전부터 고사와 문학을 통해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영리하고 재주가 많으며 사람의 행동을 곧잘 흉내 내는 모습은 때로 지혜와 재치의 상징이 되고, 때로는 인간을 풍자하는 거울이 되었다. 원숭이가 관을 썼다는 목후이관(沐猴而冠)은 겉모습만 번듯하고 그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비유하고,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원숭이 이야기는 허상을 좇는 인간을 돌아보게 한다. 《서유기(西遊記)》의 손오공(孫悟空)도 마찬가지다. 미후왕(美猴王)이라 불리는 그는 비상한 재주와 지혜를 지녔지만 자유분방하여 끊임없이 일을 벌인다. 이처럼 원숭이는 단순한 동물을 넘어 인간의 지혜와 욕망, 재치와 경솔함을 함께 비추는 존재로 문학 속에 자리 잡았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말이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오늘날에는 대개 눈앞의 차이로 남을 속이는 간사한 꾀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흔히 저공(狙公)은 원숭이를 속이는 사람으로, 원숭이는 그 꾀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존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의 원문을 자세히 읽으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장자는 저공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고, 다시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하자 모두 기뻐했다고 했다. 그리고 곧바로 名實未虧而喜怒爲用이라 했다. 명과 실에는 이지러짐이 없는데도 기쁨과 노여움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朝三暮四나 朝四暮三이나 합계는 일곱으로 같다. 장자가 주목한 것은 저공의 간교함이나 원숭이의 어리석음보다 실질은 같은데 표현과 구별에 따라 희로가 달라지는 현상이다.

이어 장자는 성인화지이시비이휴호천균(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 시지위량행(是之謂兩行)이라 했다. 성인은 이것과 저것, 옳음과 그름 가운데 한쪽만 붙잡지 않고 서로 다른 판단을 조화시켜 천균(天鈞)에서 쉰다는 뜻이다. 균(鈞)은 본래 물레의 회전축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어느 한쪽에 고정되지 않고 변화에 응하는 자연의 균형을 비유한다. 자신의 판단만을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고 서로 다른 판단이 생겨나는 까닭까지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양행(兩行)은 서로 맞서는 두 입장 가운데 하나를 없애지 않고 양쪽이 함께 통할 수 있음을 말한다. 조삼모사에 대입하면 아침 셋/저녁 넷과 아침 넷/저녁 셋 가운데 어느 한쪽만 옳다고 단정하지 않고 양쪽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장자》의 뜻을 바탕삼아 수련(首聯)은 조삼모사의 함의를 다시 묻는다. 총량은 똑같은데 하나는 분노를 일으키고 다른 하나는 기쁨을 일으킨다. 그러나 여기서 원숭이를 어리석다고 비웃을 필요는 없다. 총량이 같다는 것과 받는 시기가 같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밤을 보내고 난 아침에 배가 고프다면 아침의 네 개를 좋아할 수 있고, 저녁을 생각한다면 아침에 하나를 덜 받고 저녁의 네 개를 택할 수도 있다. 《장자》가 원숭이의 이러한 생각까지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원전을 다시 생각하면 총량이 같아도 배분 시기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저공 역시 반드시 간사한 사람으로만 볼 까닭은 없다. 원숭이를 속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했다면 본래 일곱 개를 주어야 할 것을 여섯 개만 주고 하나를 빼돌리는 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저공은 아침과 저녁의 배분만 바꾸었을 뿐 일곱이라는 총량을 줄이지 않았다. 원숭이의 반응에 따라 배분 방법을 바꾸었지만, 자신의 몫을 따로 챙긴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고사는 누가 누구를 속였느냐는 문제를 넘어 한정된 것을 언제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로도 읽을 수 있다.

함련(頷聯)은 이러한 생각을 인간 사회로 넓힌다. 사람은 대의와 명분을 내세워 선후를 다투면서도 실제 이익과 손해가 얼마나 되는지는 놓치기 쉽다. 그렇다고 명분을 버리고 실리만 좇으라는 뜻은 아니다. 명분에는 명분의 이유가 있고 실리에는 실리의 필요가 있으므로 어느 한쪽만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경련(頸聯)은 여기에 시간의 문제를 더한다. 눈앞의 득실은 직접 느낄 수 있어 절실하지만 먼 훗날의 일은 예측에 의존하므로 판단하기 어렵다. 현재의 이익을 택할 것인가 미래를 위해 지금 양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아침의 네 개와 저녁의 네 개 가운데 무엇을 택할 것인가 하는 선택과 닮아있다.

미련(尾聯)의 國事決定正如此에서 작품의 뜻은 국가의 결정으로 확대된다. 국가가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은 무한하지 않다. 한정된 예산을 어디에 먼저 쓰고 어디에 나중에 쓸 것인가!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의 부담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어느 지역에 먼저 투자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언제나 선택이 따른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에는 기다림이나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연금 개혁은 이를 생각하기에 좋은 사례다. 수십 년 뒤의 재정과 미래 세대를 생각하여 지금 부담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는 그 나름의 명분과 실리가 있다. 반대로 이미 오랫동안 보험료를 낸 사람이나 현재의 생활 부담이 큰 사람에게는 지금의 권리와 생활이 절실하다. 수십 년 뒤의 인구와 경제 상황은 현재의 자료를 바탕으로 예측할 뿐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래의 위험을 알면서 현재만 바라볼 수도 없다. 결국 현재와 미래 어느 한쪽을 무조건 옳다고 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다.

국가 예산과 지역 개발도 마찬가지다. 어느 지역에 대규모 산업 시설을 세우면 그 지역은 일자리와 세수, 기반 시설의 확충을 기대할 수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자신들이 배제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장래에 국가 전체의 세수가 늘고 그것이 여러 지역에 배분된다면 당장 공장을 유치하지 못한 지역의 손익도 처음 예상과 달라질 수 있다. 반대로 그러한 기대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현재의 직접 이익과 장래의 간접 이익을 함께 헤아려야 하는 까닭이다.

여기서 조삼모사의 저공을 통치자의 처지에 놓아 보면 고사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저공에게 무한한 도토리가 있었다면 아침에도 일곱을 주고 저녁에도 넉넉하게 주면 된다. 그러면 원숭이들의 기쁨과 분노를 두고 고민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주어진 총량이 일곱이라면 아침에 하나를 더 주는 순간 저녁에는 하나를 덜 주어야 한다. 국가의 예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두의 요구를 모두 충족할 수 없기에 통치자는 한정된 재원을 두고 선후를 정해야 한다. 이것은 이상의 통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려움을 말한다.

원숭이를 백성에 비유해도 마찬가지다. 어떤 백성은 아침의 네 개가 절실할 수 있고 다른 백성은 저녁의 네 개를 더 원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처지와 필요가 다르면 같은 총량을 두고도 원하는 배분이 달라진다. 정책을 둘러싼 서로 다른 주장 역시 모두 탐욕이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없다. 서로 다른 처지에는 서로 다른 명분과 이해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결구 名實先後應善謀의 선모(善謀)가 중요하다. 명분이 언제나 먼저라고 하지도 않고 실리가 언제나 먼저라고 하지도 않는다. 현재만을 위해 미래를 버리라고 하지도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만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명과 실, 현재와 미래, 서로 다른 사람과 지역의 이해를 함께 살피면서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뒤로 미룰 것인지 잘 헤아려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조삼모사(朝三暮四)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간사한 꾀라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 《장자》 제물론의 名實未虧而喜怒爲用과 천균(天鈞), 양행(兩行)의 뜻에서 다시 출발한다. 저공을 간사한 사람으로 몰아세우지도 않고 원숭이를 어리석은 존재로 비웃지도 않는다. 朝三暮四와 朝四暮三은 총량은 같지만 배분 시기가 다른 두 선택이며, 어느 것을 원하는가는 처지와 필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십이지의 원숭이를 돌아보면서 널리 알려진 조삼모사의 뜻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장자》 원전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정된 자원의 배분과 국사 결정의 어려움까지 생각해 본 데 이 작품의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