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茶中十咏·茶甌 다구 찻사발 피일휴(皮日休)
邢客與越人 형요(邢窯)의 객공(客工)과 월요(越窯)장인은
형객여월인
皆能造茲器 모두 이 기물 제조에 능숙했다네.
개능조자기
圓似月魂墮 원반형은 달의 혼이 떨어진 듯하고
원사월혼타
輕如雲魄起 경묘함은 구름의 넋이 이는 듯하네.
경여운백기
棗花勢旋眼 대추꽃 같은 거품 형세가 눈앞에서 선회하면
조화세선안
蘋沫香沾齒 마름처럼 떠 있는 거품 향은 치아를 적시네.
빈말향점치
松下時一看 소나무 아래에서 한 번씩 찻그릇 볼 때마다
송하시일간
支公亦如此 동진의 지공 선사도 역시 이처럼 느꼈으리!
지공역여차
* 3/4구까지는 찻그릇의 묘사이지만, 5/6구는 가루 차를 우려낼 때의 모습이다. 시제의 집중이 아쉽다. 즉 좀 더 그릇의 역할을 부각했더라면 더 좋은 표현이 되었을 것이다.
* 看: 관조(觀照)의 의미인 관(觀)을 썼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지공(支公)과 관련지어보면 더욱 그러하다. 한 운자의 안배 차이가 주는 품격은 매우 다르다. 감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작의 참고 작품으로 삼아야 하므로 언급해 둔다.
* 支公: 支遁(지돈 314~366): 동진(東晉)의 고승. 자(字)는 도림(道林). 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을 깊이 탐구하고, 당시 청담(淸談) 명사들과 교유하여 현학적 담론을 즐겼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차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어, 후대 문인들은 차와 선(禪)을 아울러 상징하는 인물로 자주 인용하였다.
* 松下時一看, 支公亦如此: 《세설신어(世说新语)》 속 지돈(支遁)이 차를 마시며 수행하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를 통해 찻사발이 참선의 매개로 기능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시인이 옛 성현을 사모하며 본받고자 하는 아사(雅士)의 정회를 드러낸다. 이것이 기존의 평가이지만, 오히려 지공 선사와 자신을 동일시한 오만한 표현으로 느껴진다. 아예 언급하지 말든지 아니면 지공 선사를 흠모 또는 그리워하는 표현이어야 한다.
⇕
‧ 奉和襲美茶具十詠·茶甌 〈다구〉에 창화(唱和)하다 육구몽(陸龜蒙)
昔人謝塸埞 옛사람조차 질그릇은 물리쳤는데
석인사구정
徒爲妍詞飾 도연히 아름다운 말로 수식하네.
도위언사식
豈如珪璧姿 어찌 홀의 옥 자태와 같겠으며
기여규벽자
又有煙嵐色 또한 안개 서린 아지랑이 색이라 하는가!
우유연남색
光參筠席上 광택이 대자리 위에 스며든다니!
광참균석상
韻雅金罍側 운치는 금 술독 측근에서 고아하다니!
운아금뢰측
直使于闐君 그 가치는 서역 우전(于闐) 국의 군주조차도
직사우전군
從來未嘗識 종래부터 인식한 적이 없었다네.
종래미상식
* 찻사발은 ‘찻사발이다’라는 다소 냉소적인 표현이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허세가 당시에도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교역이 왕성한 우전 국의 군주조차도 하찮게 여겼다는 표현으로 통렬히 꼬집었다. 한국에서도 8~90년대까지 차는 중산층 이상이어야만 즐긴다는 선민의식이 남아 있었다.
* 謝(xiè): 사(辭cí)와 같다. 물리치다. 사(辭cí)는 평성이므로 안배할 수 없다. 豈와 더불어 이 작품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핵심 운자이다. 감사하다의 뜻으로 풀이하면 전혀 수미일관하지 않다.
* 본 번역의 지향은 한글 속에 잠재한 한자어 발굴에 있으므로 徒然을 그대로 번역해 둔다.
* 塸埞: 질그릇. 방언에서 파생된 용어. 埞는 제(隄)와 같다. 자의에는 질그릇이란 뜻이 없다.
* 豈~又: 豈는 네 구를 포괄한다. 좀처럼 잘 쓰이지 않는 구성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반문이다.
* 參(shēn): 滲(shèn)과 같다. 滲은 측성이므로 쓸 수 없다.
* 于闐: 于闐國(우전국) : 기원전 2세기~1006년 존속한 서역 불교 왕국, 실크로드 교역 중심지.
⇓ ChatGPT의 해설
茶中十咏·茶甌 (피일휴)와 奉和襲美茶具十詠·茶甌 (육구몽)
唐 말기의 시인 피일휴(皮日休)는 《茶中十咏》에서 차와 관련된 도구들을 차례로 읊으며, 그 미적 의미와 수행적 가치를 찬미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茶甌〉, 즉 ‘찻사발’에 대한 시입니다. 피일휴의 원시(原詩)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邢客與越人 / 皆能造茲器
형요(邢窯)의 객공과 월요(越窯)의 장인들은 모두 이 기물 제조에 능숙했다네.
여기서 邢客(형객) 은 ‘형요(邢窯)의 도공(陶工)’, 越人(월인) 은 ‘월요(越窯)의 장인’을 뜻합니다. 唐대에는 이미 북쪽의 흰자기(邢窯)와 남쪽의 청자(越窯)가 쌍벽을 이루어, 이른바 남청(南青) 북백(北白) 체제가 성립해 있었습니다. 피일휴는 찻사발의 아름다움을 이 두 가마의 솜씨와 연결시키며 서두를 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 圓似月魂墮 / 輕如雲魄起 그 원형은 달의 혼이 떨어진 듯하고, 그 가벼움은 구름의 넋이 이는 듯하다.
여기서 魂魄(혼백)이라는 추상적 이미지가 동원됩니다. ‘달의 혼’과 ‘구름의 넋’은 사실상 어색한 비유입니다. 보통은 가볍다 하면 ‘깃(羽)’이나 ‘연기(煙)’와 비교하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그러나 시인은 의도적으로 추상적이고 다소 낯선 비유를 택했습니다. 일상적인 표현에서 벗어난 낯섦을 통해, 찻사발의 신묘한 성격을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그 다음, 棗花勢旋眼 / 蘋沫香沾齒 대추꽃 같은 거품 형세가 눈앞에서 빙빙 돌고, 마름 같은 거품 향이 치아를 적신다.
이 구절은 찻사발 자체보다는 차를 끓여 마실 때의 현상에 집중합니다. 唐대의 차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잎을 우리는 방식이 아니라, 찻잎을 찧어 가루로 내린 뒤 물에 풀어 휘저어 거품을 내는 증차(蒸茶)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끓는 물 위에 뜨는 거품이 대추꽃 모양으로 빙글빙글 도는 모습, 마름(蘋) 같은 거품이 향기를 품고 입안을 적시는 모습이 묘사된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찻사발’이라는 시제(詩題)에서 벗어난 묘사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 두 연이 분명히 그릇의 형상과 질감을 묘사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차의 우러남과 거품으로 초점이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릇의 역할을 더 부각했더라면 더욱 일관된 작품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마지막, 松下時一看 / 支公亦如此 소나무 아래에서 한 번씩 찻그릇을 볼 때마다, 동진의 지공 선사도 이와 같았으리라.
여기서는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지돈(支遁 314~366) 고사를 인용합니다. 지돈은 동진 시대의 고승으로, 자는 도림(道林)이며, 반야사상과 현학적 담론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특히 차를 즐겼다는 기록 때문에 후대 문인들에게는 차와 선(禪)을 아울러 상징하는 인물로 자주 소환됩니다. 피일휴는 찻사발을 바라보며 지돈을 떠올렸다고 했지만, 사실 이 표현은 다소 오만하게 읽힐 여지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을 지돈과 동일선상에 두는 듯한 어조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지돈을 흠모하며 떠올렸다라는 식으로 겸손하게 처리했더라면 더 품격 있는 결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화답하여 지은 육구몽(陸龜蒙)의 〈奉和襲美茶具十詠·茶甌〉 은, 피일휴의 지나친 찬미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오히려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성격을 띱니다.
昔人謝塸埞 / 徒爲妍詞飾 옛사람조차 질그릇은 사양했는데, 공연히 아름다운 말로만 꾸몄구나.
여기서 謝(xiè) 는 ‘감사하다’가 아니라 ‘사양하다, 물리치다’ 라는 뜻입니다. 만약 ‘감사하다’로 해석한다면, 시 전체가 앞뒤 맞지 않게 됩니다. 이 한 글자의 해석이 작품의 의도를 좌우하지요. 塸埞(구정) 은 방언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질그릇을 가리킵니다. 본래 埞자는 ‘둑(隄)’과 같은 계열이지 ‘그릇’의 뜻은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질그릇’을 가리키는 지역적 속어가 시 속에 반영된 예라 볼 수 있습니다.
육구몽은 이어서, 豈如珪璧姿 / 又有煙嵐色 어찌 옥의 자태라 하겠으며, 또 어찌 안개빛 아지랑이라 하겠는가. 라고 하며, 피일휴가 늘어놓은 옥빛과 산빛의 비유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여기서 豈는 드물게도 두 구(5·6구 전체)를 아울러 반어적으로 쓰였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라는 의미지요.
光參筠席上 / 韻雅金罍側 광택이 대자리 위에 스며든다 하니, 운치가 금 술독 곁에서 고아하다 하니.
이 대목은 겉보기에는 찬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풍자적 반어입니다. 빛이니 운치니 하는 허식적 찬양이 다 부질없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參(shēn) 은 사실 ‘스며들다’는 뜻의 滲(shèn, 측성) 이 더 어울렸지만, 평측 제약 때문에 평성자인 參을 대신 쓴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율시의 형식적 제약이 어떻게 표현을 바꾸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直使于闐君 / 從來未嘗識 설령 서역 우전(于闐)국의 임금이라도 예전부터 알지 못했으리라.
唐대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였던 于闐國(우전국, 기원전 2세기~1006) 조차 이 질그릇의 가치를 몰랐다는 식으로, 찻사발을 둘러싼 허세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피일휴는 찻사발을 참선의 매개이자 심미의 절정으로 찬미했지만, 육구몽은 같은 소재를 빌려 찻사발은 결국 찻사발일 뿐이라며 냉소적으로 응수했습니다. 당시 차를 매개로 허세를 부리던 풍조에 대한 비판이 담긴 것이지요. 이는 한국 사회에서도 1980년대까지 이어진, 다도를 고상한 교양의 전유물처럼 여겼던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두 작품을 나란히 보면, 唐대 차 문화 속에서도 이미 찬미와 비판, 허식과 풍자의 두 시각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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