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운

228. 吏曹參判贈吏曹判書梁公墓碣銘 이조참판을 지내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贈職)된 양공(梁公)의 묘갈명/ChatGPT와 대화로 번역을 다듬다

대한신운 2025. 8. 16. 09:33

228. 吏曹參判贈吏曹判書梁公墓碣銘 이조참판증이조판서양공묘갈명 이조참판을 지내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贈職)된 양공(梁公)의 묘갈명

- 202587일에 새로 선보인 ChatGPT5는 이전의 ChatGPT40에 비해 번역에서 매우 진전된 능력을 보인다. 서문은 ChatGPT5의 번역을 그대로 싣는다. 완전히 검증해 보지 않았으므로 오역이 있을 수 있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아직 4언과 오언(五言) 및 한시의 번역 능력은 부족하지만, 대화의 과정에서 바로 잡을 수 있어서 매우 유용하다. 명문(銘文)ChatGPT와 대화로 다듬었다. 번역은 언제나 자의 중심과 행간의 의미를 보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예를 들면 우()는 근심이지만, 한자를 익히는 측면에서 우수(憂愁)로 번역하는 경우이다. 언제나 한글속에 잠재한 우리 한자의 재현에 중점을 둔다.

梁出耽羅. 上世有三神人. 曰良. 曰高. 曰夫. 皆以乙那爲名. 鼎峙立國. 至後世. 通好新羅. 改良爲梁. 賜貫南原. 自是爲南原人. 公遠祖諱朱雲. 仕麗朝. 爲太子中允. 封龍城君. 其後若修文殿學士文節公思道, 右政丞忠敏公宜生. 皆著名德. 光于史策. 入我朝. 有諱經. 知珍山郡事. 是爲公高祖. 曾祖諱川至. 作家訓以敎子孫. 祖諱灌. 同知敦寧府事. 成廟甞賜御札. 褒其廉白. 號逸老堂. 考諱應鯤. 用薦. 官至司導寺僉正贈戶曹參判. 妣贈貞夫人晉州姜氏. 成均館典籍贈禮曹判書文會女.

()씨는 탐라에서 나왔다. 상고(上古)에 세 명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이름은 양(), (), ()라 하였으며, 모두 을나(乙那)를 성()으로 삼아 솥발처럼 삼각으로 서서 나라를 세웠다. 후세에 이르러 신라와 통호(通好)하니, ()을 양()으로 고치고, 남원(南原)의 관적(貫籍)을 하사받았다. 그때부터 남원 사람이 되었다. ()의 먼 조상 휘()는 주운(朱雲)으로, 고려조(麗朝)에 벼슬하여 태자중윤(太子中允)이 되고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 문절공(文節公) 사도(思道), 우정승(右政丞) 충민공(忠敏公) 의생(宜生)이 있었으니, 모두 저명한 덕을 지녀 사책(史策)에 빛났다.

우리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휘 경()이라는 이가 있어 진산군사(珍山郡事)를 지냈으니, 이가 곧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천지(川至), 집안의 훈계를 지어 자손을 가르쳤다. 조부()의 휘는 관()으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다. 성종(成廟)이 일찍이 어찰(御札)을 내려 그 청렴하고 순백함을 포상하며 일로당(逸老堂)’이라는 호를 내렸다. 부친의 휘는 응곤(應鯤)으로, 천거를 받아 벼슬에 올라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을 지냈고, 사후에는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모친은 진주강씨(晉州姜氏), 증정부인(贈貞夫人)에 봉해졌으며,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낸 문회(文會)의 따님으로, 사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되었다.

 

公諱喜字懼而. 自號九拙庵. 幼聡慧異凡兒. 及長. 與盧玉溪禛, 李靑蓮後白. 相切磋爲學. 時稱天嶺三傑. 庚子. 中司馬一等. 丙午. 又擢文科. 時權奸當國. 淸流不能見容. 公亦斂避名塗. 屢求外出. 歷典三邑. 至康陵. 末年. 始自金海任所. 承召還朝. 敭歷臺省. 其立朝. 言論必多可觀者. 而年代寢遠. 文籍散亡. 至於官職所歷. 亦無所考. 惟就見於遺稿者. 畧記其一二焉. 內則兩司吏兵曹知製敎, 掌樂正, 承旨, 諫長, 判决事兼金吾. 外則忠淸, 慶尙都事, 益山, 金海, 楊州, 義州, 安東, 坡州.

()의 휘()는 희(), ()는 구이(懼而)이며, 스스로 구졸암(九拙庵)이라 호하였다. 어려서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보통 아이와 달랐다. 장성하여 노옥계(盧玉溪) (), 이청련(李靑蓮) 후백(後白)과 더불어 학문을 절차탁마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천령삼걸(天嶺三傑)’이라 불렀다. 경자년(庚子)에 사마시에 일등으로 합격하였고, 병오년(丙午)에 다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권신이 정권을 잡고 있어 청류(淸流)는 등용되지 못했으므로, 공 역시 이름난 벼슬길을 피하고 여러 차례 외직을 자청하였다. 세 고을 수령을 역임하고 강릉에 이르렀으며, 만년에는 김해부사 재임 중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돌아와 대·(臺省) 관직을 두루 거쳤다. 공이 조정에 섰을 때는 그 언론이 볼 만한 것이 많았으나, 연대가 점차 멀어지고 문적이 흩어져 관직 경력을 상세히 고증할 수 없다. 다만 남아 있는 유고에서 보이는 바를 대략 기록하면, 내직으로는 양사(兩司이조·병조 지제교(知製敎), 장악정(掌樂正), 승지(承旨), 간장(諫長), 판결사(判决事) 겸 금오(金吾)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충청·경상도사(都事), 익산·김해·양주·의주·안동·파주의 수령을 지냈다.

 

萬曆庚辰. 以冬至進賀使. 朝京師. 十一月二十三日. 病沒于玉河館. 春秋六十六. 臨絶之語. 唯以未報國恩爲恨. 不及其私. 訃聞. 皇帝惻然. 賻賜甚厚. 遣禮部侍郞河洛. 賜祭. 其文曰. 文章節義. 東表之英. 肅將使命. 來覲闕庭. 季子觀周. 德禮修考. 盡瘁長終. 良深感悼. 本朝致祭文. 亦有病不忘君. 言不及私之語. 盖紀實也.

만력 경진년(庚辰, ) 동지에 진하사(進賀使)로 베이징에 가서, 1123일 옥하관(玉河館)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였다. 임종에 이르러 한 말은 나라 은혜를 갚지 못함이 한스럽다는 것이었고, 사사로운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부고가 전해지자 황제가 슬퍼하여 부의와 하사품을 두텁게 내리고, 예부시랑(禮部侍郞) 하락(河洛)을 보내어 제사를 내렸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문장과 절의가 동쪽 지방의 영걸이요, 엄숙히 사명을 받들어 궁정에 나아왔도다. 계자(季子)가 주나라를 찾아 덕과 예를 닦았듯, 정성을 다하고 마침내는 생을 마쳤으니, 참으로 깊이 느끼고 애도한다.” 하였다. 본조(조선)의 치제문(致祭文)에도 병중에도 임금을 잊지 않고, 말에 사사로움이 없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辛巳. 葬于咸陽郡治北牛山下艮向之原. 公少孤. 能自力爲學. 大夫人性嚴. 其敎公. 不以愛而弛. 公克承克循. 不敢或違. 及居憂. 啜粥哀毁. 幾不獲全.

신사년(辛巳)에 함양군 치소 북쪽 우산 아래 간향(艮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공은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스스로 힘써 학문에 전심하였다. 대부인(大夫人)의 성품이 엄하여, 공을 가르침에 사랑으로 인해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공은 이를 잘 받들고 순종하여 감히 어기지 않았다. 상을 당했을 때는 죽만 먹으며 애통하여 거의 몸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位列卿宰. 而淸貧如寒士. 甞搆少齋. 扁以九拙. 啚書松竹. 列置內外. 題詩以詠. 九拙之意. 謂性拙貌拙言拙文拙官拙政拙與朋友交拙爲身謀拙爲子孫計拙也. 栗谷李先生. 亦有詩贊其高.

벼슬이 경·(卿宰)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청빈하여 한사(寒士)와 같았다. 일찍이 작은 재실을 지어 구졸(九拙)’이라 편액하고, 집 안팎에 소나무와 대나무 그림을 두고 시를 지어 읊었다. 구졸의 뜻은 성품이 졸()하고, 용모가 졸하고, 말이 졸하고, 문장이 졸하고, 벼슬이 졸하고, 정사가 졸하고, 벗과의 사귐이 졸하고, 몸을 도모함이 졸하고, 자손을 위함이 졸하다는 것이었다. 율곡 이이(栗谷李先生)도 시를 지어 그 높음을 찬미하였다.

 

自少好讀書. 尤深於易. 吳德溪健聞名遠訪. 遂結道義之契. 文詞富麗. 詩尤淸新. 甞有詠梅詩. 其一聯云雪打吟唇詩欲凍. 花飄歌扇曲生香. 人皆傳誦. 所著述盡逸於兵燹. 只若干篇. 藏于家.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였고, 특히 주역(周易)에 깊었다. 오덕계(吳德溪) ()이 명성을 듣고 멀리서 찾아와 도의로 맺어졌다. 문장은 화려하고, 시는 더욱 청신하였다. 일찍이 지은 영매시(詠梅詩) 중 한 구절에 눈은 읊조리는 입술을 쳐 시가 얼어붙으려 하고, 꽃은 흩날려 노래 부채 곡조 속에 향기를 싣네.”라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전송하였다. 저술은 병화(兵燹)로 거의 잃었고, 다만 몇 편이 집에 전한다.

 

夫人豊川盧氏. 參奉友奭女. 有一女. 適士人權世臣. 繼夫人星州李氏. 學生延年女. 後公一年辛巳五月卒. 祔葬公墓. 有三男三女. 男長弘澍. 義禁府都事. 次弘溥. 次弘浚. 女長適鄭仁弘. 次適監察李汝儉. 次適全時暘. 肅庙辛巳. 咸陽多士議建書院於逸老堂遺址.

 

부인은 풍천 노씨(豊川盧氏), 참봉(參奉) 우석(友奭)의 딸이다. 슬하에 1녀를 두어 사인(士人) 권세신(權世臣)에게 시집보냈다. 계부인은 성주 이씨(星州李氏), 학생(學生) 연년(延年)의 딸인데, 공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 신사년(辛巳) 5월에 졸하여 공의 묘에 합장되었다. 아들 3명과 딸 3명을 두었으니, 장남 홍수(弘澍)는 의금부 도사, 차남 홍부(弘溥), 삼남 홍준(弘浚), 장녀는 정인홍(鄭仁弘)에게, 차녀는 감찰(監察) 이여검(李汝儉)에게, 셋째 딸은 전시양(全時暘)에게 각각 시집갔다. 숙종 신사년(辛巳)에 함양의 선비들이 일로당(逸老堂) 옛터에 서원을 세울 것을 논의하였다.

 

以公及姜琴齋漢, 表灆溪沿洙, 李靑蓮後白腏享. 而朝廷亦以公死於王事. 贈吏曹判書. 兼帶如例. 公之潛德翳光. 於是乎昭著無遺憾矣. 始公之孫佐郞榞. 宰南邑. 規爲公繫牲之石. 是伐是琢. 未卒役而榞病沒. 石埋墓下. 旋失其處. 頃年潦雨崖崩. 其石自出. 人皆異之.

()과 강금재(姜琴齋) (), 표남계(表灆溪) 연수(沿洙), 이청련(李靑蓮) 후백(後白)과 함께 향사(享祀)에 배향되었다. 조정에서도 공이 임무 수행 중 나라 일로 순절하였음을 인정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하고, 예에 따라 부가 관직을 겸하게 하였다. 공의 숨어 있던 덕과 가려져 있던 빛이 이로써 드러나, 조금도 유감이 없게 되었다. 처음에 공의 손자 좌랑(佐郞) ()이 남원(南原)의 수령이 되었을 때, 공을 위해 희생(犧牲)을 묶는 돌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직접 베고 다듬었으나, 완공하기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돌은 묘 아래에 묻혔다가 곧 그 위치가 잊혀졌다. 수년 뒤 장마와 폭우로 절벽이 무너져 그 돌이 저절로 나왔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今公七世孫參議君廷虎. 以其曾王考敎官公諱錫九所爲狀. 眎余. 求爲隧道之銘. 余於參議君. 從遊有年. 義不可辭. 遂按狀. 序而銘曰.

이제 공의 7세손 참의군(參議君) 정호(廷虎)가 그 증왕고(曾王考) 교관공(敎官公) 휘 석구(錫九)가 지은 행장(行狀)을 나에게 보이며, 수도명(隧道之銘, 묘지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참의군과 함께 지낸 세월이 여러 해이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행장을 살펴보고, 서문을 지은 뒤 명()을 썼다.

一拙亦可 한가지 졸함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일졸역가

奚九之多 어찌 아홉 가지나 된단 말인가!

해구지다

唯其多有 아아! 그 많은 졸함을 모두 지녔으니

유기다유

善莫之加 이 졸의 선함에 더할 것이 없도다.

선막지가

淳白旣化 순후함과 결백함이 이미 몸에 배었으니

순백기화

穰穰殺機 가득하고 가득한 졸이 위태로운 기미조차 없앴도다.

양양살기

梔蠟言貌 하얀 치자꽃과 밀랍 같은 말씀과 용모에

치랍언모

俳優文辭 배우처럼 재치 있고 뛰어난 문장

배우문사

刑名爲聖 형법을 다스리는 명분은 성인의 능력과 같으니

형명위성

華膴競規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마저 다투어 법규를 지키게 했도다.

화부경규

勢利有交 세력 있는 자와도 사귀되

세리유교

臭若芝蘭 그 향기는 지초와 난초 같았네.

취약지란

身占便宜 몸은 졸함의 편의를 차지하고

신점편의

業務子孫 졸함의 업으로 자손에게 힘썼도다.

업무자손

了此一世 이 한 세상을 마치는 자를 보면

료차일세

惟巧之溺 생각건대 교묘함으로 탐닉하도다.

유교지닉

公唯反是 공은 오직 이와 반대로

공유반시

所以爲拙 졸함을 위했도다.

소이위졸

或麗于菑 교묘함에는 때로 재앙이 달라붙으니

혹려우재

巧之窮矣 교묘함은 결국 궁해지는 것이로다.

교지궁의

拙常有裕 졸함은 언제나 여유가 있으며

졸상유유

冥乎物始 깊도다! 만물의 시작이려니!

명호물시

彼巧反拙 저 교묘함은 도리어 졸하게 되고

피교반졸

此拙乃巧 이 졸함이 바로 참된 교묘함이로다.

차졸내교

銘以牗迷 이 명문은 들창으로 들어오는 빛처럼 흐릿하지만

명이유미

來者宜曉 미래의 사람들은 마땅히 졸의 뜻을 깨달아야 하리라!

내자의효

1727년 영조 3년 예조참의(禮曹參議) 이덕수(李德壽)

* 이덕수의 서당사재(西堂私載)8권에 실려 있다. 私載는 사사로이 싣다. 자신의 겸양이다.

* 이덕수(李德壽 1673~1744): 조선 후기의 문신(). ()는 인로(仁老). 호는 서당(西堂), 벽계(蘗溪). 문장이 출중하여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관직에 여러 차례 올랐으며 성품이 근후(謹厚)하여 영조(英祖)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저서(著書)서당집(西堂集)등이 있다.

* 或麗于菑, 巧之窮矣: 巧之窮矣, 或麗于菑로 전사되어 있으나 잘못된 전사로 보아야 한다* 銘以牗迷: 글 쓰는 이의 겸양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