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운

571-2. 仰慕先祖知足堂 앙모 선조 지족당/ChatGPT와 대화로 짓다

대한신운 2026. 5. 23. 09:23

571-2. 慕先祖知足堂 앙모 선조 지족당/대한신운·()

萬古忠臣歸何處 (만고충신귀하처)

만고의 충신 어느 곳으로 돌아왔던가!

盤上刻心弄月 (반상각심농월)

석반 위에 마음 새긴 농월정이라네.

策略救趙思仲連 (책략구조사중련)

책략은 조나라 구한 노중련을 사모했고

節槪遵道排滿 (절개준도배만)

절개는 도를 받들어 청나라를 배척했네.

不染汚泥樂安貧 (불염오니락안빈)

진흙에 물들지 않는 안빈을 즐기고

毅然虛心遺大 (의연허심유대)

허심으로 의연하여 큰 밝음을 남기셨네.

巡治七鄕懸一絃 (순치칠향현일현)

일곱 고을 돌며 다스리는 동안 거문고 한 줄 걸었으니

後孫整襟銘歷 (후손정금명역)

후손은 소매 여미고 역정을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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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6-1정밀공정에 소개한 박 선생은 지족당의 후손이다. 박 선생은 직접 선조에 대한 여러 자료를 찾아 읽고, 후손의 입장에서 선조를 기리는 한 수를 구성해 보고자 했으나, 입문의 단계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보내온 자료와 구성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다듬는 과정에서 거의 내 작품에 가까운 형태로 변해 버렸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진정한 습작을 원하는 선생의 뜻을 오히려 욕보이는 결과일 것이므로, 후손이 선조를 추모하는 작품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참고 사례로 제시하고, 다시 충분히 살펴 새로운 작품으로 재구성해 보기를 권유드렸다.

후인이 추모작품을 지을 때는 흔히 추모○○○선생과 같은 형식이 시제로 사용된다. 그러나 후손의 경우 이러한 표현은 지나치게 거리감이 있어 매우 부적합하다. 이에 선조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을 담아 시제를 仰慕先祖知足堂으로 고쳐 사용한 것이다.

또한 함련(頷聯)仲連滿淸의 대장(對仗)을 이해하지 못하면, 4구는 절개는 도를 받들어 가득한 맑음을 배척한다라는 우스운 번역으로 변하게 된다. 仲連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인물 노중련(魯仲連)을 가리키며, 滿淸은 만주 청나라를 뜻하는 국명이다. 즉 인명(人名)과 국명(國名)을 대응시켜 대장을 구성한 것이다. 인명에는 인명이 가장 적합하지만, 참고 자료에는 노중련과 대응될 만한 적절한 인물이 없으므로, 知足堂이 실제로 배척했던 청나라를 대응 대상으로 삼아 구성했다. 대장 구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박명부 선생의 호는 知足堂嶺癡인데, 기존 율시의 평측 안배에만 얽매여 무심코 嶺癡를 사용하게 되면, 추모의 뜻과는 달리 자칫 선생을 의도치 않게 폄하(貶下)하는 표현으로 변할 수 있다. 특히 와 같이 부정 의미가 강한 글자는, 설령 실제 호에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추모작품에서는 절대라고 할 정도로 삼가야 한다. 이러한 부정 요소를 자유롭게 피해 갈 수 있다는 점 또한, 평측의 제약을 두지 않고 의미와 표현의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대한신운의 장점이다. 知足堂에 관한 참고 자료는 다음과 같다.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 1577~1649)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병란의 시대 속에서도 절개와 청렴을 끝까지 지켜낸 대표적 선비였다. 자는 여승(汝昇), 호는 영치(嶺癡) 또는 知足堂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한강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특히 대학(大學)·중용(中庸)과 예설(禮說)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인조 즉위 초인 1623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지방의 수령과 대간, 중앙 관직을 두루 거쳤다. 거창현감·고령현감·지례현감 등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고, 사헌부 장령·사간원 사간·홍문관 부제학·예조참의·형조참의·이조참의·한성부 좌윤 및 우윤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학문과 절의를 겸비한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병자호란이었다.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하여 조선이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고 삼전도의 치욕을 겪게 되자, 박명부는 이를 나라의 씻을 수 없는 수치로 여겼다. 그는 강화와 굴욕적 화친에 강하게 반대하였고, 끝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 화림동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세속의 영화보다 의리를 택한 것이다. 이후 종담(鍾潭) 머리에 정자를 짓고 아우 낙여헌과 함께 지내며 학문과 자연 속의 삶에 뜻을 두었다. 그 정자가 바로 오늘날의 농월정(弄月亭)이다.

농월정은 단순한 풍류의 정자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농월은 달을 희롱하며 풍류를 즐긴다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박명부가 붙인 농월의 의미는 훨씬 깊었다. 그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충절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으며, “밝은 달은 마음속에 남아 있고 청나라는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뜻을 정자 이름에 담았다. 이 의미는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등장하는 노중련(魯仲連)의 고사와도 이어진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책사 노중련은 부귀를 마다하고 의리를 지킨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박명부는 그를 밝은 달에 비유한 이태백의 시구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래서 옥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드는 형상의 자를 써 농월정이라 이름하고, 혼란한 시대 속에서 충의와 절개를 잃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농월정이 자리한 화림동 계곡 또한 뛰어난 절경으로 유명하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은 오랜 세월 동안 산과 바위를 깎으며 화림동 계곡을 이루었고, 거연정과 군자정, 동호정을 지나 황석산에서 내려온 물과 합쳐 큰 내를 만든다. 그 물길이 넓은 암반을 만나 잠시 숨을 고르는 지점에 농월정이 세워져 있다. 천여 평에 달하는 반석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오래된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예로부터 조선의 무릉도원이라 불렸다. 오늘날에도 아름다운 경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지족당은 벼슬길에 있을 때도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임금이 내린 제문에는 십 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한결같이 결백하였고, 일곱 고을을 다스리는 동안 벽에는 거문고 한 줄만 걸려 있었다는 말이 남아 있다. 이는 그가 사사로운 재물을 탐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또한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처자식조차 궁핍하게 지냈으나, 그는 끝내 자신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고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라 칭송하였다.

은거 이후에도 그의 명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다시 그를 불러 강릉부사 등의 직책을 맡겼으며, 재임 중인 1649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왕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제문을 내리고 제사를 내리게 하였고, 후대 유림들은 화천서원에 배향하여 학문과 절의를 기렸다. 이후에도 그의 충절과 공로가 재평가되어 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의 품계가 추증되었다.

오늘날 농월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한 시대를 살다 간 선비의 정신을 보여 주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아름다운 계곡과 달빛을 즐기는 풍류의 공간인 동시에, 나라의 치욕 앞에서 절의를 지키고자 했던 한 인물의 내면과 역사의 아픔은 녹여 낸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농월정을 이해하려면 단순한 자연경관만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박명부의 충절과 학문, 그리고 시대의 고뇌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선생의 생애와 농월정의 의미를 시로 구성할 때 중요한 참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