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운

257. 添酒中六咏·酒槍 술 데우는 기구 /ChatGPT와 대화로 번역을 다듬다

대한신운 2025. 9. 10. 13:32

257. 添酒中六咏·酒槍 첨주중육영· 酒槍  주창 술데우는 기구 육구몽(陸龜蒙)

景山實名士 삼국 시대 중신 경산은 실로 명사였으니

경산실명사

所玩垂清塵 늘 술 덥히는 기구를 희롱하며 드리우는 먼지를 맑혔네.

소완수청진

嘗作酒家語 일찍이 술집에서 농담조의 말을 지어내어

상작주가어

自言中聖人 스스로 취한 중의 성인이라 하였네.

자언중성인

奇器質含古 대기의 자질은 기이하고도 고풍스러움을 품으니

기의질함고

挫糟未應醇 술지게미처럼 눌러서야 응당 순후할 수 없었으리!

좌조미응순

唯懷魏公子 오직 위나라 공자 서막을 그리워하며

유회위공자

即此飛觴頻 이때는 곧바로 빈번히 술잔이 날 듯 마시네.

즉차비상빈

* 酒槍: 중국 고대에 세 발 달린 구조의 술을 덥히는 데 쓰이던 기구.

* 景山: 삼국 시대 조위(曹魏)의 중신인 서막(徐邈 172~249) 의 자. 경산창(景山槍)은 서막이 술을 따르거나 덥힐 때 쓴 도구.

* 清塵: 수레 뒤에 이는 먼지. 맑고 가벼운 먼지. 맑고 고요한 무위의 경지, 고상한 옛 자취, 고결한 품격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지만 어떠한 먼지든 맑을 수 없다. 所玩清垂塵으로 써야 하며 드리우는 먼지를 맑게 하다. 즉 술로써 세속의 먼지를 씻어낸다는 뜻이다. 오히려 자의대로 더 잘 통한다.

* 奇器質含古, 挫糟未應醇 주창의 특성으로 번역하면 7/8구와 전혀 맞지 않다. 서막의 인품을 나타낸 표현이다.

* 경산의 술창(酒槍)을 제목으로 삼고, 앞에서는 徐邈(景山)을 칭송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 의도는 육구몽 자신을 徐邈에 빗댄 자조적 은일 표현이다.

奉和添酒中六咏·酒槍 酒槍을 받들어 창화하다 피일휴(皮日休)

象鼎格仍高 솥을 본 딴 격조는 여전히 높지만

상정격잉고

其中不烹飪 그 안에서는 음식을 삶지 않네.

기중불팽임

唯將煮濁醪 오직 탁주를 끓이고자 하여

유장저탁료

用以資酣飲 달게 마심을 돕는 데 사용한다네.

용이자감음

偏宜旋樵火 땔나무 불길에 돌리기가 매우 알맞으니

편의선초화

稍近餘酲枕 (인사불성) 숙취 남아 자꾸만 베개를 가까이하네.

초근여정침

若得伴琴書 (그래도) 마치 거문고와 책을 얻어 동반한 것 같으니

약득반금서

吾將著閒品 나는 (아무리 마셔도) 청한한 성품을 드러낼 수 있으리!

오장저한품

ChatGPT의 해설

육구몽의 첨주중육영·주창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중신 서막(徐邈), 자가 경산(景山) 인 인물을 떠올리며 지은 시입니다. 시인은 먼저 경산은 참으로 명망 있는 선비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名士(명사) 란 학식과 품격으로 이름난 인물을 뜻합니다. 그는 늘 술을 데우는 기구, 酒槍(주창) 을 희롱하며 세속의 먼지를 씻어내듯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清塵(청진)’이라는 표현은 본래 맑은 티끌이라는 모순적 말이지만, 곧 속세의 티끌을 술로 깨끗이 씻어낸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서막은 일찍이 술집에서 농담처럼 말을 지어내며, “나는 술 속의 성인이라 자처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中聖人(중성인) 은 곧 술에 취한 가운데의 성인이라는 자기 도취적 표현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기묘한 기물이라 칭하면서도, 여기서의 () 를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器量(그릇, 자질) 로 돌려 읽습니다. 서막의 자질은 기이하고 고풍스러움을 머금었으나, 술지게미()를 눌러 짜듯 억눌린 세상에서는 응당한 순후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시인은 나는 다만 위나라의 공자, 곧 서막을 그리워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는 연회의 놀이를 가리키는 飛觴(비상), 즉 술잔을 서로 띄워 돌리며 마시는 장면을 그려, 스스로도 잔을 자주 들어 올린다고 마무리합니다. 이로써 술기구를 노래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서막의 인품을 빌려 자기 자조를 드러낸 작품이 됩니다.

이에 화답한 피일휴의 봉화 첨주중육영·주창은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는 먼저 술의 겉모습을 象鼎(상정), 즉 제사의 큰 솥을 본뜬 듯 웅장하다고 말합니다. 격조()는 여전히 높지만, 그 안에서는 음식을 삶지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 위엄 있는 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술만 데우는 기물이라는 점을 꼬집은 것이지요.

그는 솔직히 고백합니다. “나는 이 기구를 오직 탁주(濁醪)를 달일 때만 쓴다. 그것으로 한껏 달게 마시는 데 보탬이 될 뿐이다.” 여기서 () 는 돕다, 보태다라는 뜻이고, 酣飲(감음) 은 한껏 달게 마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술은 한쪽으로 기울여 걸어 두면 장작불(樵火)에 맞추기 제격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달여 마시다 보면 결국 숙취(餘酲)가 남아, 베갯머리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곧 인사불성이 된 주객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드러낸 장면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뜻밖에도 마치 거문고()와 책()을 벗한 듯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는 본디 책을 가까이하던 사람입니다. 곁에서 취해 쓰러지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책과 거문고를 곁에 둔 선비로 위안 삼은 것이지요. 그래서 나도 결국은閒品(한품), 곧 한가하고 아정한 풍류의 격조를 드러낼 수 있다고 마무리합니다.

이 두 작품은 술을 데우는 기구를 노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물 찬양과 자기 자조가 교차하는 시입니다. 육구몽은 서막의 기량을 끌어와 자신의 뜻을 비추었고, 피일휴는 생활적 묘사와 자기 위안을 통해 주당의 풍류를 드러냈습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을 만큼 쉽게 풀어 말하면, “술을 데우는 작은 기물에도 인물의 자질과 술객의 위안이 담겨 있다는 것이 두 시가 공통으로 전하고자 하는 정조입니다.